진주성 및 진주성전투
2. 김시민 장군
3. 진주성 1차 전투
4. 진주성 2차 전투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이다. 아버지는 지평을 지낸 김충갑(金忠甲)이며, 목천(木川)에서 출생하였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있다가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다. 당시 백성의 구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1583년 이탕개(尼湯介)가 난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워 훈련원판관으로 복직되었다. 그러나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은 목사(牧使) 이경(李璥)을 대신하여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진주성을 지켰다. 이후 곽재우 등 의병장들과 합세하여 여러 차례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고성과 창원 등지의 성을 회복하는 등의 공로로 8월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 9월에는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으며, 10월에는 왜군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그는 3,8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가 이끄는 2만의 군대를 맞아 승리를 거두었다. 진주 성 안에서의 전체적인 지휘를 그가 이끌었으며, 곽재우 최경회 등 의병장들이 적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도움을 받아 전투가 진행되었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실시된 이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맞아 동문을 지키던 김시민 장군이 적의 탄환을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그가 죽기 전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소식을 들은 것은 죽은 다음이었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봉해졌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진주(晋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3. 진주성 1차 전투
진주성 1차 전투는 1592년 10월5일부터 11일까지 7일간 계속되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요지의 대읍인데다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왜군이 진주성에 대한 공격계획을 대대적으로 세운 것이다. 하세가와, 나가오타 등이 2만 명을 이끌고 진격해 왔을 때 진주성에는 김시민이 이끄는 군사 3,700여명과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이 이끄는 군사 100여명 뿐이었다.
일본군은 6일부터 본격적으로 공격해왔는데 7일과 8일에는 종일 성안을 향하여 총탄과 화
허남오회, 2004
한국문화, 「진주성 용사일기」, 지구문화사, 2004년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 사업회,「제2회 충무공 김시민장군 선양 학술심포지엄 자료집」,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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