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라 증권의 연혁과 성장배경
주요 실적
최근의 행보 및 벤치마킹의 사례
-위기 벤치마킹
-기회 벤치마킹
노무라증권의 설립자 도쿠시치 노무라는 금융인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오사카 증권거래소의 중개인이었다. 그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도쿠시치는 계산이 밝았고 야간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공병대원으로 3년간 근무한 뒤 오사카로 귀향하여 가업을 잇게 된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대규모 자본 유입으로 일본증시는 폭등세를 기록했고 금융업은 매우 유망한 직업이 되었다. 도쿠시치는 견문을 넓히는데도 투자를 아끼지 않아서 30대의 젊은 나이에 미국, 유럽 등을 방문하여 선진금융기법을 배웠다. 일본철도건설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본을 충당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신시장을 개척해 전쟁물자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천만엔의 자본으로 1918년에 세운 오사카 노무라 은행은 현재 다이와 은행의 전신이 되었다.
노무라증권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발 빠르게 영역확대에 나섰다. 1941년 다이이치증권, 구보타증권을 합병했고, 전후 증권민주화 추세에 따라 업무를 확장해 나갔다. 1965년 조사부를 독립시켜 아시아의 싱크탱크, 노무라연구소를 설립했다. 1969년부터는 글로벌 시장을 지향하는 세계적인 증권회사로 발돋움했다. 업종 다각화를 꾀해 부동산이나 조사활동 부문에도 많은 계열회사를 두게 되었다. 일본증권업계는 노무라를 선두로 다이와, 닛코, 야마이치의 4강 증권사를 정점으로 계열화, 피라미드 체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일본경제가 1990년이후 장기침체에 들어가자 90년대후반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격게 되었다. 1995년9월 다이와은행이 채권불법거래로 금융사고사상 최대규모(11억3200만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금융기관의 후견인 격이었던 대장성에 대한 비판론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우물안 개구리식” 영업을 해온 일본금융기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80년대 중반 영국의 금융개혁을 모델로 한 이 계획은 증권사 진입규제완화, 수수료 전면자율화, 스톡옵션 제도의 허용, 금융지주회사설립 해금 등을 통해 금융시장의 자율화와 구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1997년 경쟁력에서 쳐졌던 산요증권이 파산해 버렸다. 선두주자였던 노무라증권은 자회사인 고쿠사이 증권을 도쿄미쓰비시은행에 팔았고, 다이와 증권은 스스로 스미토모 은행계열로 편입됐다. 대형사인 니코는 도매영업부문을 살로먼 스미스바니 (현 씨티그룹)에 매각했고, 1998년 도산한 4위 야마이치 증권은 미국 메릴린치에 넘어갔다. 1997년이후 일본증권사 중 30%가 주인이 바뀌었다.
설상가상으로 노무라 증권은 “총회꾼 이익공여사건”이라는 사상 최대 금융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1997년 노무라 증권이 야쿠자들을 주주총회에 동원하여 말썽을 부리도록 사주하고 불법대출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경영진 구속, 업무중단 등 중대위기를 겪게 된다. 일본인들에게 신뢰가 깊은 증권사였던 만큼 당시의 충격은 대단했다.
노무라 증권은 스캔들과 부실경영이 잇따르면서 1999년 4600억엔(약4조6000억원)이 넘는 손실을 기록했다. 창립이래 최대 위기상황을 맞았다. 노무라는 이 때 전략의 일대변화를 단행했다. 글로벌투자은행이라는 당초목표를 일단 접고 고수익을 지향하는 국내 선도증권사를 지향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노무라는 감량경영과 수익구조 재정비를 위해 전체 직원의 20%에 달하는 2천명을 감원했다. 자회사인 고쿠사이 증권도 매각했다. 수익사업의 다각화에도 박차를 가했다. 과거 법인중시경영에서 국내 개인투자가 중심 경영으로 변신을 추진했다. 동시에 수수료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고객재산을 증식시키는 자산관리영업으로 변신을 기도했다. 그리고 수수료를 챙기는 중개형 증권업에서 자기자금을 투자, 스스로 리스크를 지는 리스트럭처링 사업으로 활로를 개척해 나갔다.
그 결과 노무라 증권의 실적은 크게 개선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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