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

 1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1
 2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2
 3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3
 4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4
 5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5
 6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6
 7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7
 8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8
 9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9
 10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10
 11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11
 12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1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서양미술사] 드가의 예술 세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Degar 의 일생
Deger의 작품과 평
Deger의 예술의 세계
Deger의 작품들
본문내용
댄서들을 다룬 작품들 중 대표적인 무용 수업(The dancing Class 1874) /과 발레 수업( Ballet Class 1878-80) 이 있다. 유명한 발레 선생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춤추는 무용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역시 전경의 우측 하단을 사선으로 갈라 인물을 한쪽으로 치우치는 구도를 쓴다. 거기로부터 공백이 크게 있고 멀리 떨어진 좌측 상단에 보이는 한 무리의 무희들은 그들의 자세만큼이나 공간 안의 다른 사람들과 불안정한 관계를 보인다. 그 두 그룹은 마치 이 스튜디오 안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거리가 있지만 균형을 이룬다. 드가는 이렇게 한쪽에 무게를 두는 구도를 자주 이용한다. 아주 급하게 잘려진 사람의 인체도 흔히 보이는데, 어색하지 않음은, 드가가 단순히 형태적 무게만을 상정하지 않고 그들 간의 심리적 관계까지 이해하고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드가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런 내적, 심리적 복합성과 관계의 가시화이다.
  발레가 당시 소녀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많은 수의 발레 지망생들을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는 주장들을 근거로 파리 소녀들에게 발레는 하나의 통과의례가 되면서 그들을 둘러싼 문화 - 발레 강습소, 그들을 돌보는 샤프롱과 후원자들까지 - 가 자연스레 생성되었다. 당시 발레리나가 사회에서, 여성이란 다른 성(the other sex)의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의미하는데, 그녀들은 쉽게 남성의 관람의 대상이 되면서 발레리나로 성공하기 전부터 이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그러한 경향은 사회에 유통되던 여성에 대한 이데오르기와 맥을 같이 한다. 그렇기에 드가의 작품 중에는 무대 뒤에서 발레리나를 기다리는 나이가 지긋한 부르주아 남성들을 묘사한 것들이 많이 있다.


 캬바레 Cabaret (1876)나 Cafe-concerts 는 드가가 자주 선택했던 주제로 파리 시민들의 여흥 공간에 화려한 무대와 악사들, 무희와 가수들이 등장한다. 오케스트라 석의 악사들을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과감하게 자르고 화면의 전경에 배치함으로 화면 앞으로 튀어나오듯 보인다. 그들의 위로 펼쳐진 무대에는 가수들이 등장하는데, 이들과 상당한 거림감이 느껴지고, 공간의 높낮이 차이를 이용한 거리감의 표현으로 시선의 움직임이 재미있다. 가수들의 화려한 의상과 반짝이는 샹들리에, 마치 파리의 밤 풍경을 보여주는 듯 이야기가 있는 이미지 전달이다.


1. 모색의 시절
  드가의 예술의 세계는 일반적으로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모색의 시절, 인상주의 시대, 원숙의 손놀림이 그것이다. 첫 단계는 모색의 시절로 인상주의 화가들과 만나기 시작한 이전의 시절이다. 인상주의 전시회가 1874년 4월에 시작되었으니 모색의 시절을 1873년까지 계산하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 듯 싶다. 드가는 1854년 나폴리로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에서 르네상스 대가들의 그림에 흠뻑 젖는다. 조토의 공간적 미학을 만났고, 만테냐의 영혼과 사랑을 만났고, 베로네제의 색을 만났다. 1855년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앵그르를 만나게 된다. 1856년과 1857년, 드가는 이탈리아를 다시 찾는다. 로마에서 피렌체까지 여행한다. 귀스타브 모로 등과 만나면서, 그들과 ‘달밤’이란 이름의 그룹을 만들어 예술에 관한 토론을 벌인다. 젊은 시절의 이탈리아 여행은 드가에게 고전주의를 알려주었다. 따라서 그가 1860년대에 전통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역사화를 그렸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865년 드가는 살롱전에 처음으로 출품했고, 중세 전쟁의 한 장면을 묘사한 이었다. 그 안팎으로 등과 같은 역사화를 그렸다. 결국 드가에게 1860년대는 역사화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가는 천성적으로 수줍어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야외의 풍경을 그리기보다는 루브르에서 대가의 작품을 모사하는 것에 열중했다.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탈리아를 자주 여행하였지만, 이탈리아의 풍광은 그에게 커다란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도시인이었던 것이다. 드가는 또 1860년대에 초상화를 그리는 데 전념하는데, 자화상을 비롯해서 대부분이 가족과 친척, 그리고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1868년 살롱전에 드가는 을 출품한다. 그 그림도 궁극적으로는 인물화였다. 그런데 그의 관심이 바야흐로 무대, 오페라 무대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했다. 실재 인물의 초상이면서 현실세계를 동시에 표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 1872년에는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으로 가서 뉴올리언스를 찾는다.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름다운 풍광을 이야기하지만 그의 관심은 역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 그리기 시작한 는 뉴올리언스라는 도시의 실상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는 친구 제임스 티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증명되는데, “이 도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목화밖에!” 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