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론을 통해 본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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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국론을 통해 본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11월 13일 타가스테(Thagaste)에서 출생하여, 430년 8월 28일 히포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이 지상에서 76년의 삶을 누렸으나, 그가 살았던 세기는 4세기와 5세기에 걸친다. 그의 출생연대는 기독교가 국가에서 공인된 후 41년이 지난 후이고, 그의 죽음은 서로마가 476년에 멸망하기 36여년 전에 해당된다. 이같은 몇 개의 연대적 연관성만으로도 그가 살았던 시대의 격동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로마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으로 극심한 혼돈을 겪고 있었고, 이것은 단순히 로마제국이라는 정치적 단위의 혼란이기도 했지만, 한 시대가 가고 다른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변화의 폭은 넓고도 심대한 것이었다.
「신국론」의 저술은 410년 고트족을 이끈 알라릭(Alaric)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과 직·간접의 관계를 갖고 있다. 당시 로마는 제국 최고의 행정 수도는 아니었다. 80여 년 전(330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라릭의 약탈은 거의 정확하게 로마가 마지막 침탈을 당한 지 800년 후의 최초의 사건이었다. 더구나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다음에는 로마를 교황도시로 보는 시각이 생겼다.
그럼에도 로마는 아직 곳곳에 이교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특히 상류층에서는 이 같은 경향이 심하였다. 로마 종교는 그리스의 영향이 많아 주피터를 주신으로 숭배했고 상대적으로는 스토아주의와 에피큐리아니즘(Epicurianism)이 깊숙히 귀족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알라릭의 로마 약탈은 전통적인 제신들을 무시하고 기독교를 옹호한 데서 발생했다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로마 쇠퇴의 이유에 대한 열띤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들간의 논쟁은 길고 다양한 것이었으나 요컨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 교리는 이 세상을 거부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이것이 국가에 대한 봉사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로마의 국가적 운명은 항상 다신(多神)들의 숭배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믿어왔는데, 기독교의 공인과 전파는 이교신(異敎神)들을 배반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로 인해 로마 몰락의 징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북아프리카의 로마 관리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친구였던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는 기독교 옹호에 대한 자신의 역부족을 느끼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책을 쓰도록 요청했다(412년).
「신국론」에서 펼쳐진 내용의 구상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참고문헌
을유사, 아우구스티누스 저, 윤성범 역, 1983 ꡔ신국/고백ꡕ
민음사, 이석우 저, 1995 ꡔ아우구스티누스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