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론1 - 일본 측의 무대응․강경대응의 원인
3. 본론2 - 쿠빌라이가 일본에 조공을 요구한 이유
4. 결론 - 요약 및 정리
물론 몽골의 요청에 대하여 일본이 처음부터 무대응․무대책으로만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몽골과의 전쟁을 회피하려는 입장에서 외교적 수단을 강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것이 무산되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을 뿐이다.’ 남기학,「중세 일본의 외교와 전쟁」,『동양사학연구 70집』, 2002, pp.197~198
‘가마쿠라 막부는 큐슈의 다자이후로부터 보내온 몽골국서를 고려국서와 함께 교토조정에 올리는 동시에 1268년 2월 몽골에 대한 경계령을 서국지방의 고케닌들에게’ 위 논문, p.198
내렸다. 한편 국서를 접한 교토조정은 처음에는 몽골의 요청에 대응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웠으나, 1269년 몽골의 4번째 사신이 渡日한 것을 계기로 기존의 방침을 바꾸어 몽골 측에 返牒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교토조정은 ‘返牒을 작성하여 막부에 보냈으나 막부는 이것을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위 논문, p.199
그렇다면 막부는 왜 조정의 返牒을 묵살하였던 것일까?
교토조정은 返牒을 몽골에 보냄으로서 ‘몽골의 통호요구는 완곡히 거절하면서도, 전쟁 사태를 미연에 막기 위한 외교적 수단을 강구’ 위 논문, p.200
하려 하였다. 조정의 이러한 행동은 ‘국가의 중대사를 스스로 담당하려는 의식’ 남기학,「몽고침입과 조막관계의 전개」,『일본역사연구 3집』, 1996, p.11
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고, 동시에 ‘조정의 위정자의식이 고양’ 위 논문, p.11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외적 위기 상황 속에서 조정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외교 면에서 막부의 주도권을 제약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만일 返牒을 계기로 몽골의 사신과 牒狀이 도래하여 조정과 몽골의 접촉이 활발해지게 된다면 막부가 고립화될 우려’ 남기학,「중세 일본의 외교와 전쟁」,『동양사학연구 70집』, 2002, p.201
도 있었다. 따라서 막부는 조정의 외교권 발동을 억제하고, 대신 자신들이 국정을 주도하기 위해서 ‘牒狀의 無禮’ 위 논문, p.200
함을 핑계로 조정의 返牒을 묵살하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 막부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은 ‘싯켄(執權)이라는 公職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호조씨 宗家의 長인 도쿠소(得宗)’ 위 논문, p.202
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그러나 호조씨는 본래 막부의 고케닌과 同列의 신분으로, 도쿠소는 쇼군이 갖는 고케닌 지배의 정통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외국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하여 군사적 대결을 피하려 한다면 지배의 정통성을 결여하고 있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대항세력의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을 우려’ 남기학,「중세 일본의 외교와 전쟁」,『동양사학연구 70집』, 2002, p.202
하였다. 따라서 막부의 도쿠소권력은 몽골에 대해서 무대응이라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즉 ‘막부의 도쿠소 권력은 고케닌 지배의 정통성을 결여한 만큼 對몽골 강경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해 왔으며, 자신의 권력 유지와 강화에 있어서 몽골에 대한 군사적 대결을 유용한 대의명분’ 위 논문, p.204
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몽골에 대한 일본의 무대응 방침에는 “조정-막부-도쿠소 권력 간의 관계라는 정치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몽골에 대한 일본의 무대응․강경대응 방침에는 “일본 집권층의 국제적 시야의 결여”라는 요인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본의 지배층은 “국제적 시야의 결여”로 인해 몽골에 대하여 소극적․폐쇄적 대응으로만 일관했던 것이다. ‘10세기 이후 대륙과 한반도를 둘러싼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동요 속에서 바다 건너 일본은 줄곧 나홀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란․여진의 대두로 동아시아 정세가 일변하고 송과 고려가 북방민족의 침략에 고심하고 있을 때 일본은 아무 침입도 받지 않고 동아시아의 변동의 국외에 서있었다. 즉 일본은 동아사아 속에서 특수한 위치’ 남기학,「10~13세기의 동아시아와 고려․일본」,『인문학연구 9집』, 2002, p.133
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당시 일본의 지배층들은 국제적인 시야를 결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조정이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고려의 대신이었던 이장용은 ‘일본이 몽골의 조공요구에 응할 리가 없다고 판단’ 남기학,「중세 고려․일본 관계의 쟁점」,『일본역사연구 17집』, 2003, p.85
하여 몽골사신이 渡日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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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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