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본 `지구영웅전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식민성은 슈퍼히어로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배트맨은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파트너인 로빈을 강간한다. 강간은 언제 어디서든 장소에 관계없이 당당하게 이루어진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배트맨에 대한 로빈의 태도이다. 로빈은 배트맨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배트맨이 원할 때는 기꺼이 자신의 엉덩이를 내놓는다.
마치 미국에 대한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겉으로는 혈맹, 친구라고 말하며 웃지만, 우리 머리위에 군림하기를 원하는 미국. 오히려 먼저 엉덩이를 내놓고 강간해달라고 아양을 떠는 대한민국. 우리 사회에서는 현 상황에 대한 불평만이 있을 뿐, 그것의 원인을 파헤쳐 벗어나려고 시도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려고만 하고 있다.
『지구영웅전설』에서 읽을 수 있는 이러한 지배 구조와 함께 주목해야 할 대상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인 ‘소년’이다. 슈퍼 히어로들은 그럴듯한 수많은 이름 중에서 하필이면 소년에게 ‘바나나맨’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왜 ‘바나나맨’일까? 바나나는 겉으로는 노랗다. 하지만 껍질을 까보면 새하얗다. 노란 껍질은 한국인과 같은 동양인을 의미하고, 새하얀 속살은 서구 사회의 인간으로 편입하기를 희망함을 뜻한다. 슈퍼히어로들은 소년을 친구라고 얘기해준다. 하지만 소년은 단지 친구일 뿐 같이 세계평화를 지켜나가는 동료가 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소년은 ‘바나나맨’일 뿐 그들처럼 겉과 속이 모두 하얗게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보다는 미국인으로서의 삶과 정신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바나나맨’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영웅 이름을 사용해 풍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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