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학교설립운동
첫째. 학교설립운동은 실력양성운동과 관련이 있고 기성회 형성 등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자본가, 지주계층이 부르조아 민족주의 운동가와 연관성이 있는 경우가 있었다.
둘째. 학교설립운동은 몇몇 지주나 자본가 또는 사회운동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설립지를 포함한 주변지역 내지는 도 단위에서 민중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셋째. 일제는 3.1 운동 이후에 조선인에게 공평한 교육기회를 보장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표면적인 주장이었을 뿐이다. 이 후에 설립된 각종 관공립 고보의 경우를 보면 그 설립운동의 주체와 자금을 마련한 것은 순수한 민중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며 일제는 공식적으로 지역학교의 설립자금을 지방관청에 떠넘기는 동시에 설립주체를 압박하여 설립운동을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넷째. 기성회 설립의 주체인 자본가나 지주계층은 직간접적으로 일제와 연관성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압력에 대응능력이 부족하였고 기성회는 설립운동의 초기에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연구된 학교설립에 대한 연구는 연구의 주제상 수치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식민지 시기 전반을 다 다루는 것은 분석에 있어 불명확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1920년의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1920년대 고보교의 수는 관립 5개, 사립 9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1920년대 초부터 학교설립운동이 활성화 되었는데 1920년에서 1923년 사이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함경북도 길주, 함경남도 이원, 황해도 안악, 해주 , 평안남도 안주, 평안북도 강계, 의주, 영변, 강원도 강릉, 원주, 전남 순천, 여수, 영광, 경상북도 상주, 대구, 경상남도 부산, 진주, 통영, 충남 홍성, 천안, 공주 등지에서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1929년의 고보교의 수는 관립 15개, 사립 9개교로 총 24개교였다. 운동이 활성화 된 10년 동안 경우 관립학교 10개가 생성된 것은 학교설립운동이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음을 말해주며 이런 결과를 토대로 운동의 실패를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대다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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