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전후 국내외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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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의 발단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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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선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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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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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 음 말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도쿄 혼교(本鄕)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사카이 나카(坡井)라는 일본 여자를 알게 되어 그녀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우범선 등 이른바 '을미망명객'들은 국내에서 그들에게 현상금을 걸고 자객을 파견하였기 때문에 늘 암살당할 위험 속에서 살았다. 당시 이들은 대부분 고베(神戶)에서 박영효가 경영하는 조일신숙(朝日新塾)에 있었고, 이곳에서 그는 윤효정(尹孝定) 등과 한국의 고학생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일신숙이 해산되자 우범선은 1903년에 구레시(吳市)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만민공동회 사건과 폭발약 음모사건으로 1899년 7월 일본으로 망명한 전(前)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高永根)이 1903년 7월 오사카의 윤효정의 식객으로 왔다. 그는 윤효정으로부터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살해한 괴수 우범선이 일본에 망명해 있다는 것을 듣고, 그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고영근은 일찍이 명성황후의 총애로 병마절도사의 관직을 받았다. 이에 그는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영근은 우범선에게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해 우선 윤효정이 그를 살해하려 한다는 음모를 말하면서 그의 의심을 풀었다. 그 후 그들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져 우범선은 고영근에 대한 경계를 누그러뜨리게 되었다. 우선 그는 우범선이 거주하는 구레시에 집 한 채를 빌려 그곳에서 기거하였다. 이어 고영근은 1903년 11월 24일 집들이를 겸하여 우범선을 초청하였다. 집들이에 온 그를 고영근은 미리 준비한 단도로 목과 어깨를 찔렀으며, 고영근의 종자 노원명(盧遠明, 혹은 魯允明)이 철퇴로 그의 머리를 몇 차례 내리쳤다. 이로써 우범선은 타국에서 국모시해에 대한 심판을 받았다. 고영근의 우범선 암살에 관한 것은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그를 살해한 고영근과 노원명은 즉시 히로시마 경찰서에 자수하였고 '국모보수'의 문구를 보여 주었다. 한편 국모시해범 우범선이 고영근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소식이 그가 죽은 다음날 알려지자, 중추원 의장 김가진(金嘉鎭)과 특진관 민영우(閔泳雨), 시종원경 이유인(李裕寅), 정3품 윤이병(尹履炳), 법부대신 이재극(李載克) 등이 고영근의 죄를 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고종은 국모시해범을 처단한 고영근의 죄를 면해주었다. 반면에 우범선의 친일·반민족적 행위는 죽음을 통한 응분의 대가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오고 있다.
(5) 아버지의 범죄, 아들(우장춘 박사)의 속죄
서두에서 역사적 상황을 잘못 판단하였을 때 그 해독은 다음의 세대까지 그 후과가 남겨진다고 했는데, 여기 근대화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사적 과오를 속죄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명성황후 시해범 우범선의 아들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한참이던 때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국내로 돌아와 일심으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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