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명의 역사] 로마의 노예제도와 전후 노예제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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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문명의 역사] 로마의 노예제도와 전후 노예제도 비교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로마 이전의 노예제도

2.로마의 노예제도

3.로마 이후의 노예제도
본문내용

로마의 노예제도
로마는 노예제 사회였다. 노예제 사회란 한 사회의 주요 생산이 노예노동에 의존하고 총 인구 중에 노예수가 일정비율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를 가리킨다. 로마는 국가건설 초기에는 그리스 등지의 다른 사회처럼 가부장적 노예제가 주를 이루는 단계였으나 기원전 1 세기 말부터 인구의 30% 이상이 노예였고, 이를 통해서 볼 때 노예제는 로마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로마는 기원전 2세기부터 본격적인 노예제 사회로 변모하였다. 로마 시대 노예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말하는 도구’였다. 로마 시대의 노예는 폐쇄적 공동체의 배타적인 세계관에 의거해 출발하였다. 핀리(MI. Finley)는 ‘공동체로부터 뿌리 뽑힌 사람’ 레비브륄(Levy-Bruhl)은 ‘모든 노예는 외국인’이라는 말로 고대의 노예관을 잘 표현하였다. 당시 노예제의 발달 이유는 당시 유럽의 토지 생산성이 낮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생산량 증대를 위해서는 노동생산성을 높여야만 했다. 하지만 도구 혁신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노동시간을 확보해야했는데, 그러한 이유에서 도구나 가축적인 개념으로서의 노예 개념이 탄생했다. 그 중에서도 고대에서의 대규모 노동노예제 발달 조건으로 노예가격의 경제성과 영속적인 영리기업의 존재라는 두 가지를 뽑는다. 특히 노예의 경제성은 기본 전제를 피정복민의 노예화에 두었다. 전쟁포로가 노예화의 가장 근본적이고 쉬운 방법이었으며 공화정 중기와 후기 동안의 가장 중요한 노예 공급원이었다. 한편 로마에 있어서 영속적인 영리기업은 바로 대규모 농장이었다. 대규모 농장은 로마의 시대가 지나면서 자영농이 몰락하자 부유층의 재산 확대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시민 중심 사회로 출발한 로마사회에서 정복 전쟁이 공화정 중기-후기로 갈수록 활발해졌고, 정복의 범위 또한 이탈리아 반도에서 국한되었던 것이 지중해 세계로 넓어졌다. 이것은 곧 로마 시민들이 타지에서 복무해야할 시간이 전보다 늘어남을 의미했다. 군대에 지원했던 로마 시민들은 오랜 전쟁 때문에 가사와 가정 경제를 돌볼 시간이 없었고 따라서 자영농들의 토지는 생산성이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이것은 자영농민층의 몰락을 의미했고 일부 부유귀족층에게는 토지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부유한 귀족층은 대규모의 토지를 확보하였고, 때마침 정복 전쟁을 통해 들여온 대규모의 피정복민 출신 노예들을 농장에서 노동할 수 있도록 조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로마의 노예제는 노동노예제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노동노예제가 로마 역사에서 긍정적인 역할만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값싼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