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개혁과 의화단운동
※ 무술변법의 시행과 그 목표
※ 수구파의 무술정변
※ 의화단(義和團)운동과 그 결과
청일전쟁 패전과 그에 따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로, 젊은 독서인층(讀書人層)은 망국의 위기감을 절감하였다. 그들은 패전의 경험에서, 유럽의 무기·기술만을 도입하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한계를 깨닫고, 전통적인 정치체제·교육제도 개혁으로서 부국강병을 실현해야만 중국이 근대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청일전쟁(1894~95)에서 중국이 패한 후,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국에 끊임없이 특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청일전쟁에 이어 중국 곳곳에서는 서구식 개혁을 주장하는 단체들이 생겼다. 캉유웨이康有爲가 자신과 함께 과거시험을 치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든 단체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1만 어(語) 상소문'을 작성하여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을 반대하고 정치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제안했지만 청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기존의 관료들 가운데 1898년에 나온 〈권학편 勸學篇〉으로 널리 알려진 장지동(張之洞)이 이끄는 보수적 개혁파는 중국의 전통체제를 유지하면서 서구식 산업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이 점차 높아지고 청일전쟁으로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된 서양열강들이 서서히 중국에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하자, 청 조정은 개혁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마침내 광서제(光緖帝)가 캉유웨이를 주목하게 되었고, 1898년 1월 캉유웨이는 황제 측근의 고위 관리들을 만났다.
1898년 6월 11일 황제는 캉유웨이가 제안한 개혁안 가운데 외국의 유익한 문물을 배우자는 안건을 우선적으로 채택했다. 이것이 무술개혁이 일어난 동기가 되었다. 1898년 6월 16일 캉유웨이는 처음으로 황제를 알현했다. 그 후 온건한 방법의 개혁운동을 주장하던 조정의 관료들은 뒤로 밀려났으며, 캉유웨이와 그의 제자로 잘 알려진 량치차오(梁啓超)를 포함한 그 밖의 추종자들이 황제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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