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II. 본론
2) 현리 전투 배경
3) 현리 전투 상황
4) 전투 진행과정(날짜 순)
5) 전투결과
6) 패배요인
III. 결론
7) 교훈 및 시사점
IV. 참고 자료
1. 개요
현리 전투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2일까지 강원도 인제 현리지구 근방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3군단과 중국 인민해방군 9병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한국전쟁은 개전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 시소 전쟁이라 할 만큼 치열한 전쟁, 그 자체였다. 인천상륙작전, 백마고지 전투, 흥남 철수 등 대한민국을 살리는 계기가 된 승리도 있었지만 전쟁인 이상 국군이 패한 전투 또한 무수히 많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군 역사상 치욕의 전투라 칭해지는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현리 전투'가 그것이다.
1951년 5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게 된 국군과 UN군의 재반격으로 전선은 다시 북상하여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시기, 중공군은 다시금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공세를 지속적으로 감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서부전선을 방어하던 미군의 방어는 매우 견고하였고 중공군은 그 전략적 의지를 관철시키기가 블가능해 보이는 듯했다. 결국 중공군은 다른 방도를 찾게 되었고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당시 중동부전선을 방어하던 국군이었다.
당시 국군은 전쟁 초반 낙동강 까지 밀리며 많은 전력이 소모된 상태였고 징집된 병사들 또한 거듭된 북진으로 인해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인원이 대부분이었으며 또 다시 밀리게 되자 그 조차도 속절없이 소모된 상태였다. 이를 알고 있던 중공군은 국군을 목표로 하여 중부 전선을 장악한 후 수도권을 대포위 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여 5월 공세를 개시한다.
1951년 중반 중부 전선의 병력 배치는 강원도 인제를 중심으로 좌익엔 미10군단이, 우익엔 국군3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험준한 지형의 특성상 그 경계를 정확히 설정하고 병력을 배치하기가 애매모호한 실정이었다. 당시 미군과 국군의 경계 남쪽 끝자락에는 국군의 유일한 보급로 거점인 오마치 고개(현 오미재 고개)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오마치 고개를 두고 미군과 국군의 작은 의견차이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3군단의 입장에선 이 오마치 고개는 중요 거점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방어 병력을 주둔시키려 하지만 그 위치가 미 10군단 관할이었다는 이유로 10군단의 반발을 사게 되고 결국 병력을 철수시키게 된다. 문제는 후에 발생하는데 미10군단은 이 지역을 그대로 무주공산으로 방치해 두는 실수를 저지른다.
1. 개요
현리 전투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2일까지 강원도 인제 현리지구 근방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3군단과 중국 인민해방군 9병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한국전쟁은 개전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 시소 전쟁이라 할 만큼 치열한 전쟁, 그 자체였다. 인천상륙작전, 백마고지 전투, 흥남 철수 등 대한민국을 살리는 계기가 된 승리도 있었지만 전쟁인 이상 국군이 패한 전투 또한 무수히 많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군 역사상 치욕의 전투라 칭해지는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현리 전투'가 그것이다.
1951년 5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게 된 국군과 UN군의 재반격으로 전선은 다시 북상하여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시기, 중공군은 다시금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공세를 지속적으로 감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서부전선을 방어하던 미군의 방어는 매우 견고하였고 중공군은 그 전략적 의지를 관철시키기가 블가능해 보이는 듯했다. 결국 중공군은 다른 방도를 찾게 되었고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당시 중동부전선을 방어하던 국군이었다.
당시 국군은 전쟁 초반 낙동강 까지 밀리며 많은 전력이 소모된 상태였고 징집된 병사들 또한 거듭된 북진으로 인해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인원이 대부분이었으며 또 다시 밀리게 되자 그 조차도 속절없이 소모된 상태였다. 이를 알고 있던 중공군은 국군을 목표로 하여 중부 전선을 장악한 후 수도권을 대포위 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여 5월 공세를 개시한다.
1951년 중반 중부 전선의 병력 배치는 강원도 인제를 중심으로 좌익엔 미10군단이, 우익엔 국군3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험준한 지형의 특성상 그 경계를 정확히 설정하고 병력을 배치하기가 애매모호한 실정이었다. 당시 미군과 국군의 경계 남쪽 끝자락에는 국군의 유일한 보급로 거점인 오마치 고개(현 오미재 고개)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오마치 고개를 두고 미군과 국군의 작은 의견차이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3군단의 입장에선 이 오마치 고개는 중요 거점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방어 병력을 주둔시키려 하지만 그 위치가 미 10군단 관할이었다는 이유로 10군단의 반발을 사게 되고 결국 병력을 철수시키게 된다. 문제는 후에 발생하는데 미10군단은 이 지역을 그대로 무주공산으로 방치해 두는 실수를 저지른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