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과 시민의식
1.1. 제1막-드레퓌스 대위의 체포와 재판, 그리고 유배
1.2.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
1.3. 제2막-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 그리고 승리
2.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지식인들의 노력-에밀 졸라를 중심으로
1894년 7월, 프랑스 군인 에스테라지 소령이 간첩을 자원하려는 목적으로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독일 군인 슈바르츠코펜 대령과 접촉했다. 당시 프랑스에는 제2국이라는 이름의 정보국이 방첩활동을 목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에스테라지는 이 조직 내에 소속된 앙리 소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간첩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9월 26일 에스테라지가 슈바르츠코펜에게 넘기려고 한 명세서를, 당시 간첩 혐의를 받고 있던 브뤼커가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명세서를 넘긴 범인, 무뢰한 D를 추리하다가 드레퓌스가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들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지목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레퓌스는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유대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군 복무 중인 프랑스 군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은 군사학교 시절부터 공공연하게 차별의 이유가 되었으며, 간첩 혐의를 받는 데에도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 탓에, 필적 감정이 모호하고, 필체가 달랐으며, 문서 상의 내용과 그의 행적에 모순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체포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 후 벌어진 가택수색과 수사들도 모두 증거가 불충분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10월 28일 앙리가 언론에 보낸 쪽지 때문에 이 사건은 공개되었고, 당시 언론은 갖가지 음모를 제기하며 재판 회부를 요구하였다. 특히 수사 도중 입수한 암호를 그에게 불리하게 멋대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변호사는 이러한 증거들을 보고 무죄를 확신하였다. 12월 19일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변호사는 일반 대중들이 증거가 매우 많은 걸로 인식하고 있다며 공개재판을 요구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를 집요하게 방해하여 결국 비밀재판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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