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향찰
1.2향찰과 향가
1.3향찰과 이두
2.향찰 해독의 문제
3.향찰 표기의 기본
4.참고문헌
1.1 향찰이란 무엇인가?
향찰(鄕札)이라는 명칭은 1075년(고려 문종29년)의 에 보인다. 향찰은 신라시대 발달한 표기수단으로 한자를 차용한 자국어 표기 수단의 집대성이다. 그것은 이미 발달되어 있은 체계들 즉, 고유명사 표기법과 이두 및 구결의 확대라고 볼 수 있다. 현존 자료는 매우 드물며 그것 역시 향가에 국한되어 있어 ‘향가식 표기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향찰의 존속기간에 대해서는 고려대에 오면서 그것이 소멸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향찰이 고려 일대를 내려왔고 급기야 조선초 국자가 제정됨으로 말미암아 소멸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향찰을 신라의 표기법으로 인식하여 접근하고 있고, 후자의 입장에서는 향찰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까지 그 역할을 대신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2 향찰(鄕札)과 향가(鄕歌)
향찰과 향가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그 둘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향찰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향찰과 향가의 관계를 살펴봄에 앞서 그 둘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향(鄕)’에 대한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 이것은 향가의 연구에 의해 규명되고 정립되었기에 향가 연구를 통해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향가에 대한 연구는 일인(日人)학자 소창진평에 의하여 일찍이 그 발단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원래 조선사람은 옛날부터 자신의 나라를 중국의 한 지방으로 생각함으로써 만족하고 있었다. 그 까닭에 자기 나라의 언어와 같은 것은.....(중략).....方言이란 명칭으로 부르고....(중략)...외국에 대하여 자신의 국토를 鄕이라고 말하고, 자기 나라의 음악을 鄕歌 자기 나라 말을 鄕言이라고 일컬은 예도 적지 않다......(중략)....조선사람이 조선 고유의 가요에 대하여 鄕歌라는 명칭을 쓰게 된 것도 전혀 이와 같은 의도 이외는 없다.
이와 같은 향가(鄕歌)이해의 태도는 이후 우리 연구자에 의해 결정적으로 비판, 시정된 것 같지 않다. 이후 양주동은 ‘향(鄕)’에 대해 가상(可尙)한 명칭’이 아니라고 하였고, 조윤제는 ‘(중국에 대해서) 겸손한 뜻에서 쓰인 말’이라 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향가(鄕歌)는 삼국통일 이후 외래문화(중국)에 압복된 신라 사회가 자기폄시적인 사대모화의 의식에서 자기 나라 노래를 겸양 내지 낮추어서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향가라는 이름이 과연 삼국통일 이후에 나타난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그것이 반드시 사대적인 자기폄시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이름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런 문제점을 바탕으로 이후의 학자들은 향가는 중국시가에 대한 우리의 가요를 의식하고 있는 명칭이되 자기비하적인 명명으로만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는 국가(國歌-나라노래)라는 뜻으로 한시나 한문이 아닌 우리말로 된 노래의 범칭이라는 것이다.
1952년 정병욱은 향가에 대한 광협의 뜻을 말했는데, 광의로는 중국시에 대한 우리나라의 독특한 노래로, 협의로는 신라시대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는 사이에 제작된 이두식 문자로 표기된 시가로 풀이하였다. 이것은 소창진평, 최남선, 양주동, 조윤제에 의하여 이미 논의된 내용을 정리, 요약한 것으로 최근까지고 향가에 대한 정의로 이것이 인정받고 통용되어 내려오고 있다. 이후 후대
신재홍(2002), 『향가의 해석』 집문당
황패강(2001), 『향가문학의 이론과 해석』일지사
이기문(1998),『國語史槪說』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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