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투쟁과 성공의 시간
(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흥성과 쇠망
(3) 왜 18세기에 실패를 겪었는가?
(4) 신세계에서의 실패 : 네덜란드의 성공과 한계
2. 패권과 자본주의
(1) 암스테르담에서는 창고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2) 상품과 크레딧
(3) 위탁교역
(4) 인수교역
(5) 대부의 유행 또는 자본의 쇠락
(6) 다른 조망 : 암스테르담으로부터의 떨어진 곳
(7) 발틱 해 연안지역
(8) 프랑스 대 네덜란드 : 불평등한 싸움
(9) 영국과 네덜란드
(10) 비유럽 : 말레이 군도
(11) 일반화가 가능한가?
3. 암스테르담의 쇠퇴
(1) 위기들 : 1763년, 1772-1773년, 1780-1783년
(2) 바타비아 혁명
(1) 투쟁과 성공의 시간
아시아에서 향신료를 독점하고 가격을 강제로 고정시키며 거래량을 통제할 수 있었던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의 경쟁국가들에 비해서 유리한 위치에 있어서 17세기경에는 사정이 좋았다. 그러나 1696년을 전후한 30∼40년 동안에 사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크리스토프 글라만에 의하면) 이때 아시아의 교역과 유럽 시장에서 동시에 기존 질서를 크게 교란시키는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후추의 우월성이 사라졌으며, 비단류나 면직류와 같은 인도의 직물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또 차, 라카, 중국 도자기 등의 새로운 상품들이 등장했다. 또 이 회사가 많이 이용하던 순환로에 틈새가 벌어졌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차 무역의 확대와 각 국 상인들에게 중국이 개방된 일이다. 1698년부터 영국 동인도 회사가 현찰교역(직교역)에 들어간 반면, 네달란드 동인도 회사는 정크 선들로부터 중국 상품을 구매하는데 익숙했기 때문에 간접교역을 고집했다. 마지막으로 면화, 은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아편을 주고 차를 구하는 벵골-중국 사이의 연결이 영국에게 이익을 주었다. 게다가 그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성공에 기여했던 코로만델 해안이 인도 내의 전쟁으로 황폐해졌다는 점이다.
(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흥성과 쇠망
- 이 회사의 초기 자본금은 650만 플로린이었으며, 3000 플로린짜리 주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는 2년 전에 만들어진 영국동인도 회사보다도 열 배가 많은데 1699년의 계산에 따르면 64톤의 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실질적인 이 회사의 이윤율은 결코 엄청난 수가 되지 못한다. 즉, 1720년 배당은 40퍼센트였지만 주식가격은 3만 6000 플로린이어서 이윤율은 3.44퍼센트에 그쳤다.
이것의 의미는 : 1) 동인도 회사는 자본의 증가로 인한 이점을 누리지 못했고 2) 동인도 회사의 주식 총액이 적어서 네덜란드인의 엄청난 투기를 다 감당하지 못했으며, 3) 원래의 자본이 650만 플로린에 대해서 1년에 평균적으로 20퍼센트의 수익을 가져왔다면 주주들은 매년 100만 플로린 이상을 받은 셈이 된다.
- 사실 문제는 동인도 회사의 실제 수익에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연구와 자료가 불충분한 관계로 해답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대차대조표에 의한 연구결과에서 동인도 회사의 실질적 이윤은 거래에 어려움이 없었던 17세기에도 이익이 아주 근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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