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은 1875년 6월 6일 어느 일요일 정오에 북부 독일의 해안도시 뤼벡에서 태어났다. 토마스 만이 탄생한 해는 이미 1871년 독일이 보불전쟁에서 승리하여 비스마르크의 영도하에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던 해이다.
토마스 만의 유년 시절은 아버지가 뤼벡 시의 당당한 세도가였던 관계로 매우 유복한 편이었다. 3남 2녀의 형제 중에서 그보다 네 살 위인 하인리히는 동생과 마찬가지로 훗날 세계적인 작가가 된 하인리히 만(1871~1950)이다. 형인 하인리히 만이 참여적 문학의 길을 걸으면서 전환기 독일의 문사로서 민주주의적 투쟁에 앞장섰던 데에 반해, 동생 토마스 만은 독일민중이 처해 있던 정치적, 사회적 문제와 민주적 기운에 대해 관심과 감각을 지니지 못한 채 프로이센적 윤리의식과 근면성으로 오직 창작에만 정열을 쏟았다. 하지만 그 이후 『바이마르에서의 로테』와 『요접과 그의 형제들』, 『파우스트 박사』를 통해서 사회에 참여하는 작가로 변화를 한다. 하지만 정치적 개안이 늦었다는 것은 토마스 만의 중대한 결점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 테마로서 정상인과 비정상인, 즉 예술가와의 대립의 문제가 빈번히 취급되고 있는데 우등생도, 모범생도 아니었을 뿐더러 선생과 학우들에게 멸시를 당했던 학교시절부터 이 대립을 직접 체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강제성을 증오하고 자유를 희구하며 이 대립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 평생을 통하여 노력했다.
토마스 만이 15세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시민적 굴레로부터 더욱 자유롭게 되어, 더 이상 공부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학교와 시민사회의 낡은 분위기에 저항하는 글들을 썼다. 그러나 그 당시 그의 문학적 태도가 저항적, 참여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경직된 학교 및 시민사회에 대한 정서적인 혐오감을 표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초기 토마스 만의 예술관은 삶과 정신의 대립 그리고 예술가의 존재와 그 구제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었으나 『마의 산』의 제작에 착수한 당시의 토마스 만은 다가오는 시대를 피부로 느끼면서, 새로운 것과는 끝내 타협할 수 없고 개인적인 정체의식과 시대의 전환에 대한 예감이 중첩되어 그의 내면에 중대한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토마스 만의 대표작이자 독일의 교양소설로도 손꼽히는 『마의 산』은 실제로 1912년 만의 부인이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요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를 문병하러 가서 겪었던 체험들이 이 작품을 쓰게 한 동기가 되었다. 『마의 산』의 집필은 1913년 9월에 시작 되었으나 이듬해에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정치적 비평서인 『고찰』의 집필을 위하여 중단되었고 1918년 3월 16일에 『고찰』을 발표한 토마스 만은 이듬해 3월에 4년간이나 중단되어 왔던 『마의 산』 집필을 재개하여 1924년 11월 28일 이것을 발표했으니, 이 대작의 제작은 무려 11년에 걸친 대하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황현수, 토마스 만의 문학과 사상, 세종출판사, 1996
홍길표, ‘시간의 탈 시간화 혹은 근대성의 자아성찰’,실린곳: 독일언어문학 제19집(2003.3), 107-134
김현진, ‘서술 상황으로 본 이야기의 이해, 『마의 산』의 서술구조’,실린곳: 독일언어문학 제11집(1998.11),119-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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