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사육신 시조의 재해석
1. 계유정난에 대한 역사적 설명 및 고찰
2. 사육신 시조에 대한 기존의 해석
3. 사육신 시조에 대한 우리의 해석
1)세조의 정치적 이용과 후대 신하들의 정치적 이용
2)시조의 재해석
Ⅲ. 결론
Ⅳ.참고문헌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조선 전기의 충격적 사건은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그 중 대표적인 희생자인 사육신은 그와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특히 그들의 는 지금껏 처연한 감정의 표현과 애절한 충심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본고는 당시 사육신이 역모의 죄로 사형을 당했으며 그런 역적들의 문학작품이 어떻게 지금 까지 높게 평가되어 왔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역모의 죄는 삼족까지 멸하는 큰 죄다. 선비들의 문학 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사후에 후손에 의해 편찬되던 문집에 의해 전해 내려오는데, 역모죄인들의 문학작품은 직계자손이 없는 만큼 기록되어 전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사육신의 문집은 직계 후손이 아닌 다른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편찬되기까지 하며 지금까지 고결한 충정을 기리는 노래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이 시조들이 과연 단순히 처연한 감정의 전달이 훌륭해서, 애절한 충심이 인상 깊어서 아무 관련 없는 후대인들이 따로 이름 지어 편찬하고 남겼을까. 본고는 그 이유에 대해 단순히 감정 전달 만이 아닌 또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고, 이를 역사적 사실의 재해석을 통해 유추했다. 또한 사육신의 를 새로운 의도를 지닌 작품으로 해석하여 그 근거를 마련했다.
Ⅱ. 사육신 시조의 재해석
1. 계유정난에 대한 역사적 설명 및 고찰
병약한 문종이 재위 3년 만에 죽고, 6대 단종이 즉위했을 때는 겨우 12세였다. 이 때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의 야망과 수완이 비범하다는 것을 안 문종은, 유언으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3대신과 집현전 학자들에게 어린 왕에 대한 보필을 당부했다. 그러나 대군들이 다투어 세력 확장을 도모했고, 수양대군은 권람·한명회와 같은 인물을 포섭, 대권 가도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김종서를 1453년 10월 무사들을 이끌고 집으로 쳐들어가 살해하였다. 그리고는 김종서가 모반하므로 급박하여 아뢸 여가가 없어 죽였다고 상주했다. 이어 왕명을 빌어 신하들을 소집,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 반대파 중신들을 궐문에서 죽이고, 좌의정 정분 등을 귀양 보냈다가 이어 죽인 다음,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바로 아래 동생인 안평대군이 김종서와 통했다고 뒤집어 씌어 강화도로 유배시킨 후 사사했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바로 영의정부사, 이조·형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여 왕위찬탈은 시간문제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다 하여 계유정난이라 한다.
이광식, , 가람기획, 2004
김대행,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3
한국인물사연구원, , 타오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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