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선전포고한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해 큰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다.
양국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나빠진 것은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체결하고 동남아시아 침략을 기도했기 때문이다. 격분한 미국은 미일 통상 항해조약을 파기했으며 철과 석유의 대일본 수출을 중지하고 ABCD(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 포위망을 형성하여 일본에 경제적 타격을 가했다.
양국은 전면 전쟁의 회피라는 데에는 일치하여 1941년부터 미일교섭을 개시해 타결점을 모색했으나 교섭은 암초에 부딪쳤다. 미국이 일본군의 중국 철수를 요구하는 헐 노트를 제출하자 교섭은 결렬되고 일본은 개전을 결의하였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내걸고 전쟁에 돌입했다. 마닐라와 싱가포르를 함락하고 남양 군도를 점령하였다.
전쟁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환을 맞이하였다. 이 해전의 대패로 일본군은 열세로 돌아섰다. 패배가 잇따르고 제해권, 제공권도 빼앗겨 일본 본토는 격심한 공습에 시달렸다. 이에 책임을 지고 도죠 히데키 내각은 사퇴하고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탄생하였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식량부족, 노동동원이 일상화해 국민생활은 극도로 곤궁해졌다.
1945년 4월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하였다. 고이소 수상을 대신한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국민에게 철저한 항전을 호소하면서 한편으로는 소련을 중개로 비밀리에 미국과의 강화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6월 격전 끝에 오키나와를 함락하고 8월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으며, 소련도 일본에 전쟁을 선언하였다. 8월14일 일본정부는 연합군이 발표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 항복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미국의 항공모함 1척을 침몰시킨 대가로 항공모함 4척, 전투기 300대로 제해권과 제공권을 일순간에 상실했다.
*국민동원의 실태
태평양 전쟁기간 중의 육해현역군인 수는 1941년에는 239만 1000명,1943년에는 337만 2000명,1945년 8월에는 696만3000명으로, 패전시에는 남자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철저한 병력동원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청장년의 동원은 노동력 수급에 심각한 차질을 가져와, 태평양전쟁 이전의 단계에서 벌써 노동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다. 노동력부족을 원활히 하기위해, 1939년 7월‘국민징용령’이 공포되어, 초기에는 1939년1월에 공포된 ‘국민직업신고령’ 에 의거하여 신고의무가 주어진 특정의 직종의 기능 기술자에게 필요에 따라 적용되었다. 그러나 1940년의 일차개정, 41년의 2차개정을 거치면서, 16세에서 25세까지의 미혼여성이 공급가능 노동력으로 등록되었다. 1943년의 제3차 개정에 의해 징용은 한층 강화되었다. 1944년 3월말 육해군관
『일본사 101 장면』, 가람기획, 강창일․하종문 지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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