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명성황후의 탄생과 책봉
대원군과의 갈등
정권 장악과 친정외교(親政外交)
두 세력간의 다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조선측 입장)
결론 - 명성황후의 죽음은 조선의 죽음이었다.
참고자료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는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여흥(驪興), 이름은 정호(貞鎬)이다. 아버지 민치록(閔致祿)은 민씨가 아홉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으며, 1남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어 외동딸로 자랐다. 고아가 된 민씨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궁궐에서 쫓겨나 몇 년 간 근신하며 지냈던 감고당(感古堂)에서 후처였던 어머니 한산 이씨와 둘이서 살게 되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한 살 아래였던 고종(高宗)과 가례를 올려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왕비로 책봉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고아였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전반 안동김씨(安東金氏)와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세도정치 하에서 파락호 생활을 하며 날개를 펼 기회를 기다리던 흥선군 이하응은 철종이 병이 들어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자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에게 접근하여 둘째아들인 명복으로 하여금 왕실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누구보다 왕실 외척들의 전횡으로 피해를 본 인물이었기 때문에 왕비, 즉 며느리를 선택할 때 신중을 기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대원군이 정한 왕비 간택의 조건은 명문가 출신이되 현재는 친정이 미약하거나 고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치록의 딸을 추천한 인물은 흥선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 閔氏)로, 민치록과는 상당히 먼 인척관계였다. 민씨는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와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인데다가 고아라는 의미에서 바로 대원군이 찾던 최고의 자격을 갖춘 며느리 후보였던 것이다.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한영우, 효형출판, 2001
『조선의 왕비』, 윤정란, 차림,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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