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야나기 무네요시를 생각한다 그의 조선관에 관한 소고
- 그의 조선관에 관한 소고(小考) -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올림픽이나 여타의 국제적 규모의 스포츠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시상대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 역시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생각하며 가장 가슴 찡한 느낌을 주는 노래야 말로 애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과연 정말로 그러한가? 애국가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불리고,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노래는 다름 아닌 ‘아리랑’일 것이다. 외국인이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 노래라며 따라 부르는 노래, 해외 동포들이 모일 때 마다 서로 부둥켜안고 부르는 노래, 심지어 응원석에서 우리나라 선수를 응원하며 부르는 노래까지 아리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 퍼진다. 그 가사는 어떠한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아 /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
언뜻 살펴보아도, 젊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내기 싫어 장난스럽게 부르는 노래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껏 ‘아리랑’ 하면 ‘한(恨)’의 감정을 떠올렸다. 왜 그런가? 우리는 초등학교때부터 아리랑은 ‘한’을 담은 노래라고 배웠다. 즉 우리 민족이 어려운 고비 고비를 넘기며 부른 노래라는 것이다. 당연히 노래를 부를 때의 속도로 느려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원래 이 곡은 경쾌하게 불렸다고 한다. 오히려 언제부턴가 이 곡에 ‘한’이 서리게 되었고,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노래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왜 우리는 한이 서려 슬픈 민족이 되었을까? 식민지 조선과 그 예술을 너무나 사랑했다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떠오른다.
본 고에서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생각하며, 그의 조선관에 대해 몇 가지 지점에서 그의 언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필자는 미학 전공자도, 예술 전공자도 아니기에 구체적인 예술작품을 통한 해설은 피했다.
2.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에 영향을 끼치며 활동했던 시기는 일본의 식민정책이 소위 무단에서 ‘문화’ - 식민 정책을 이처럼 단순화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 통치로 변모하기 시작하는 1920년대 초반으로, 이 시기는 한국 근대 문예의 출발기로도 볼 수 있는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 그에 의해 전개되었던 ‘조선예술’에 관한 이론들은 한국 근대 문예의 시작과 함께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수밖에 없었고, 그 영향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모하긴 했지만 변함없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의 미론(美論)이 지닌 파급력은 지금도 여전히 양쪽에서 팽팽하게 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긴장감을 준다. 그 첫 번째 긴장감은 바로 늘 슬픈 조선으로서의 ‘비애의 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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