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신화형성비평 -광야曠野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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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기의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가혹한 절망, 폐색(閉塞)과 동결, 나아갈 곳이 없는 막힘과 임리(淋)한 혈흔, 굴복과 실추.
하늘이 끝난 고원에 있어 높음은 희망일 수도 승화일 수도 없다. 그것은 절망의 꼭대기, 포기의 절정일 뿐이다. 그 위에 선다고 할 때, 그것은 발돋움일 수가 없다. 위가 이미 위가 아닌 곳에 이 작품의 시적 자아는 서 있다. 단두대 위에 올라 섰을 때, 누가 그 ‘위’에다 긍정적인,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을까. 올 데 갈 데 없는 곳까지 왔다는 생각,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휘몰려와 있다는 생각, 그것도 세계의 끝인 듯한 저 하늘끝의 극지에 쫓겨 와 있다는 생각에 맞물려 있는 ‘고원의 위’고 보면 위기감의 고조가 있을 뿐이다. 이런 위답지 못한 위의 상념은 칼날진 서릿발로 한층 더 강조되고 있다.
승리자의 깃발과 환호만을 위해 산정이 솟아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추적당한 자의 백기(白旗)와 절망을 위해서는 산정은 더욱 높은 것이다. 굴러 떨어져 맛보게 될 실추감보다는 쫓겨 올라가 맛보게 될 파국감이 한결 더 처절할 것이다. 여기 육사의 역설적인 이 솟아 있다.
‘하늘 끝’, ‘고원’, ‘칼날진 위’, 그리고 ‘서다’의 중첩에 의해 절망의 피라미드는 더욱 첨예화한다. 위로 올라가면서 쌓아올려진 이 절망감은 이제 하향한다. 반전하여 무릎을 꿇으려 한다. 바늘끝처럼 뾰족한 삼각점 위에 서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바에는 이제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러나 제겨 디딜 곳이 없기에 무릎을 꿇을 수마저 없다. 무릎 꿇음은 기구였을까? 아니면 굴복이었을까? 어느 쪽으로 짚는다 해도 절망의 도수는 이제 극에 달한다. 기구의 몸짓이 용납되지 못하고, 굴종의 시늉마저 불가능한 그 아슬아슬한 진공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끝났는가 하면 무릎 괼 땅도 이제 끝나고 없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더불어 끝나고 오직 바늘끝 한 점만이 이 시적 자아에게 주어져 있다. 천지와 더불어서 공간이 끝장난 것을 확인하는 마지막 극점, 바늘끝 위에 그는 자리잡고 있다. 박탈당한 공간, 박제가 된 공간에 육사의 절망감이 집약되어 있다.
2. 시공(時空)의 재생
는 의 대구가 될 작품이다. 박제가 된 공간이 재생하여 시원스레 트이게 되면서 광야는 펼쳐진다. 는 시간과 공간의 재생을 요구한다. 시는 하늘의 열림과 땅의 태어남을 그 머릿부분에서 노래한다. 이내 시간이 소리내어 흐르기 비롯하고 천지간에 움직임이 있게 되면서 인간문화도 한몫을 거든다. 작품은 여기까지에서 천지개벽의 첫 순간을 회상하고 문화의 첫 태동을 기억해 낸다. 그것이 육사의 ‘창세기’다.
하늘이 거듭 열리고 땅이 다시 트이고 강물이 흘러 길이 새롭게 벋기를 마음해야 할 때다. 지금의 시는 그 몫을 담당해야 한다. 거듭 있을 천지개벽의 은근한 씨앗이야말로 시라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 쓰는 일, 를 쓰는 일은 엄숙한 춘경의례(春耕儀禮)에 비길 수 있게 된다. 그 밭갈이와 파종은 의례적이다. 그리고 그 의례는 언제나 은유고 상징이다. 농경은 농경으로 끝나지 않는다. 씨앗은 자신이 움트면서 대지와 우주의 거듭남을 확인시킬 것이다. 그러기에 시 가 치르는 춘경은 신화적이다. 빼앗겨서 더럽혀진 땅과 그리고 그것을 덮고 있는 하늘을 새롭게 갈고 일구는 일이기 때문이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백마에 인도된 혁거세가 그러하였듯이 새로운 세계를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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