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개설
칸트의 심오한 사상을 내가 번역된 문자를 보고 어떻게 이해하고 다시 나의 머리를 통해 표현해야 될지 많이 걱정이 되었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권의 책을 펼쳐본다고 해서 제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 하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도덕, 법, 규칙 따위의 규범들이 어떻게 당위로서 존재하며, 그런 것들을 과연 누가 만들며, 왜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도덕·윤리 교과를 공부하면서 항상 느끼게 된다. 나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고, 적절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과거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사람인 칸트의 사상을 통해서 그 해답에 조금이나마 접근해 보려 한다. 하지만 내게 있어 칸트라는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것 조차 너무 어려운 일이다. 칸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데카르트의 사상을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칸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으며, 배경 지식이 되는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칸트에 대한 책을 읽어도 그 책에 함의 되어 있는 속뜻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칸트가 고뇌하고 탐구했던 철학적 사상들이 칸트의 머릿속에 나와 문자로 표현되는 순간 그 내용이 100% 그대로 전해질수가 없다. 이미 문자를 통해 표현되는 순간 칸트의 사상은 축소되거나 확대되는 등 왜곡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다. 문자라는 것은 상징이며, 세상의 많은 상징을 사용하더라 인간의 정신세계나 사상을 그대로 100% 담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칸트의 사상을 모두 이해 한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내가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책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칸트의 사상을 종합하여 인간의 특성을 개인과 사회의 측면에서 고찰 해보려고 한다.
II.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1. 공동체주의와 공리주의
정치활동, 사회활동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활동들은 그 본질을 파고 들여다 보면 결국, ‘자유주의’이냐 ‘공동체 주의’냐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정치에서 말하고 있는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도 자유주의나 공동체 주의라는 측면에서 이중 어느 하나에 속하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개인으로서 사회에 속하게 된다. 그 옛날 원시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게 되고,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미 ‘개인’으로서 ‘사회’라는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즉, 모순되는 말이지만 개인은 사회 속에 있고, 사회도 개인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과 사회의 동형성의 관계가 예를 들어 포도나무에 있는 포도씨앗은 외부의 어떤 작용이 있더라도 포도나무가 된다는 것과 같은 측면인 것이다.
나아가 사회목적론(Social teleology)에서 보았을 때 사람도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된 인간 상태가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인간의 완성된 상태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도덕교육이 할 일이다. 즉, 공동체주의라는 것은 사회목적론과 마찬가지로 이미 답이 공동체 속에 있다고 보는 입장인데, 아리스토텔레스도 공동체주의 입장에서 공유해야 할 그 어떤 것이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운영을 위해 덕6개가 필요하기 때문에 용기, 중용 등의 6개의 덕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런한 6개의 덕을 다 갖추면 인간은 행복해진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아리스토텔레스는 6개 덕의 원천이 공동체 즉, 사회에 있다고 본 것이다.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을 도덕성이나 인격 등을 평가할 때 보편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공동체의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모든 공체에는 탁월성과 규범성이라는 두가지 기준이 존재한다. 바로 규범성의 측면에서 좋은 것, 나쁜 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함양 시켜주는 것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도덕교과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주의는 바로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하였고, 지금도 존속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속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도덕 교과의 역할이 앞으로도 중요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공동체주의라는 이론에 조심스럽게 공리주의자의 이론 접목시켜보겠다. 공동체주의와 공리주의자를 접목 시키는 것은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 저의 짧은 지식이 잘못되었다면 교수님께서 지적해 주십시오...
공리주의는 벤담, 밀이라 철학자들이 주장하였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공리주의도 서로 다르고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론의 확실한 차이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공리주의 유용성의 원리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측면에서 공동체주의 공리주의를 접목시켜 보려 한다. 공리주의는 본성을 따지는 철학이 아니라 행위가 정당한가에 대해 물음에 답을 구하는 철학이다. 즉, 기준을 따지는 것인데, 이러한 기준은 결국 공동체에서 생기는 것이다. 최대다수의 측면에서 최대의 행복을 주는 행동을 올바른 행동이라고 보는데, 결국 최대 다수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는 어떤 것이 공동체에게 좋은 것이며, 또 어떤 것이 공동체에게 나쁜 것인지에 대한 규범성이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 그 규범성을 기저에 깔고,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때 무엇이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줄 것인지에 대한 의사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공동체의 규범성이라는 기준이 공리주의 철학에서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는 말이다. 또한 공동체 속에 답이 있다고 보는 공동체주의와 최대 다수의 사람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 된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해서 공동체주의가 무조건 옳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는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해서 전통적으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시작하던 초기의 공동체의 운영원리는 결국, 소수의 기득권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소수의 기득권층의 오만과 폭력의 입장에서 잠시 플라톤의 입장을 비판하자면, 플라톤은 철저히 폭력적이고, 계급적인 사람이다. 플라톤은 머리, 가슴, 배로 철인, 전사, 평민이 해야 할 일들을 철저히 규정하고, 그들이 함양해야 할 지혜, 용기, 절제의 덕도 미리 규정했다. 철인의 이야기가 곧 진리라고 보았는데, 기득권인 철인이 영혼의 세계를 관장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은 철인을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바로 초기의 공동체의 운영 원리가 소수의 기득권의 생각을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고, 이렇게 시작된 공동체의 생각은 결국 그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의 생각인 것이다. 즉, 공동체의 시작이 소수의 생각으로 이루어져있고, 공동체 구조 자체가 불평등하고, 이것을 영속화 시키는 것이 공동체주의에 들어 있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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