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게토 봉기 Warszawa Ghetto Upri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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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바르샤바 게토 봉기 Warszawa Ghetto Uprising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바르샤바 게토 봉기 (Warszawa Ghetto Uprising)
- 목 차 -
Ⅰ. 바르샤바 게토 란?
Ⅱ. 게토 봉기가 일어나게 된 원인
Ⅲ. 게토 봉기의 결과
Ⅰ.바르샤바 게토란?
게토라는 단어는 이탈리어이며 어원(語源)은 히브리어 ‘절연장(絶緣狀)’을 뜻하는 ‘get’에 유래하며, 중세 이후의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 지역을 가리킨다. 게토는 본래 내부사회는 유대인의 공동체사회로서 어느 정도의 자치가 허용되었으나, 시민권은 허용되지 않았다.
바르샤바 게토는 유대인 자치지구인 다른 게토들과는 달리 독일이 폴란드 점령지 곳곳에 세워 유대인을 처형 전까지 가두어두는 격리 수용소였다. 처음에는 가시철조망이었으나, 나중에는 높이 3m, 길이18km의 벽돌담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원래 프라하에 세워질 계획 이였으나 학살 계획이 변경됨에 따라 바르샤바 시내에 설치되어 40만 유태인이 힘든 나날을 지내게 된다.
Ⅱ. 게토 봉기가 일어나게 된 원인
1942년 7월~9월 중반사이 독일군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시골의 노동수용소로 옮긴다고 유대인들을 속여, 30여만 명의 게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트레블링카로 옮겨 가스실로 학살 하였다. 바르샤바 게토에는 약 6만 명의 유대인들이 남았다. 그 즈음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에서의 유대인 집단학살에 대한 소식이 바르샤바 게토로 흘러들자, 남은 유대인들은 강제 이소에 대항하기위해 "유대인 저항단"이라는 무장 자위대를 만들었다.

Ⅲ. 게토 봉기의 진행
최초의 무장 저항은 1943년 1월 초 히틀러의 오른팔이자 나치 친위대 대장이었던 힘러가 바르샤바 게토를 방문하여 소개 명령을 내린 직후 시작됐습니다. 힘러는 자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바르샤바에 4만 명의 유대인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몹시 화를 냈고. 그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이 게토에 들이닥친 1월18일, ‘유대인 저항조직’이 독일군을 상대로 처음으로 무력 저항을 했다. 이 저항은 4월 봉기의 단초가 되었다. 유대인 저항조직은 주로 십대에서 이십대 초반 이였던 수백 명의 유대인들로 구성돼 있었고. 이들은 직접 만든 화염병과 약간의 소총과 몇 자루의 경화기로 무장하여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죽기 위해서 독일군에 저항했다.
나치 친위대(SS) 대장 하인리히 히믈러는 히틀러 생일인 4월 20일을 기념해 4월 19일 날 무력으로 게토를 소탕하려는 작전을 발표했다. 4월 19일은 유대인들이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전 날이었다. 새벽에 2천명의 SS대원과 무장군대가 탱크, 속사포, 탄약 트레일러 등을 앞세우고 게토에 쳐들어와다. 게토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유태인은 미리 마련한 벙커 속에 숨어 있는 동안 대표적 유태인 저항조직인 ZOB와 일부 유태인 게릴라 독립부대 약 1,500명은 권총과 소총 몇 개, 기관총 1점, 손으로 만든 폭탄 등으로 사격을 가하면서 많은 탱크를 파괴하고 독일군을 죽이면서 게토로 침입하려는 중강군을 물리쳤다. 독일군은 저녁에 철수했으나 다음날 싸움이 재개 되었고 사상자 수도 늘어났다. 독일군들이 유대인을 벙커에서 쫓아내기 위해 가스, 경찰견, 화염방사기 등을 사용해서 도시 전체는 화염에 휩싸였다. 그 해 5월 8일에서야 나치는 ZOB 본부 벙커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 곳에 숨어 있던 민간인들은 모두 항복했지만, ZOB의 지휘관 모르데차이 아니엘레비치와 전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에도 5월 16일까지 전투가 계속 되다가 유태인의 탄약이 모두 떨어지면서 전투는 독일군의 학살로 변해버렸다. 28일 동안 5만6천명이 넘은 유태인이 학살되고 압송되었고 수백 명의 독일군이 죽어다. SS의 위르겐 스트로프 소장은 바르샤바의 유대교 대회당을 폭파하고 "바르샤바 게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