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례 ▽
Ⅰ. 개 요
Ⅱ. 서 론
1. 충주의 역사
2. 충주의 전설
1) 가금면에서 온 아들바위 - 주덕면
2) 마당 참나무가 준 벌 - 충주시 연수동
3) 정저리 들 - 충주시 칠금동
4) 형제 바위 - 충주시 용두동
5) 이시미 바위 - 충주시 단월동
6) 상어배미 흰죽배미 - 충주시 호암동
7) 쉰 벙거지 굴 - 충주시 목벌동
8) 청계산 청룡사 - 소태면
9) 자객이 마을 동제 - 소태면
10) 도깨비 가마를 탄 허적 - 소태면
11) 풍류바위와 옥녀 - 엄정면
12) 왕이 쉬어갔던 왕박산 - 산척면
13) 치마벼루와 며느리 소 - 동량면
14) 애달픈 정생원골 - 동량면
15) 중국에서 가져온 지팡이 - 금가면
16) 원한의 중종골 - 금가면
17) 신통력으로 쌓은 김생제방 - 금가면
18) 평강 채씨네 거북돌 - 가금면
19) 목계 솔밭 - 가금면
20) 지네와 독사의 싸움 - 앙성면
21) 부처 바위 - 앙성면
22) 상여 바위 - 신니면
23) 팔봉의 귓돌 바위 - 이류면
3. 충주 방언의 특징
1) 음운
① 자음체계
② 모음체계
2) 문법
3) 어휘
Ⅲ. 결 론
■ 참고문헌
◆ 충주 방언 정리 자료 - 로마자 표기
Ⅰ. 개 요
1. 답사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일대
2. 답사기간 : 2005년 11월 25일(금)
3. 답 사 자 : 이학기(00), 차범석(01), 한주연(01), 구정화(03), 임소현(03), 최미지(03),
최은혜(03)
4. 답사일정 : 충주시 도착 → 충주시청 → 탄금대 → 점심식사 → 충주시립도서관 →
충주시 가금면 → 버스를 타고 귀가 함
5. 답사방법 : 방문 질의, 기록, 녹음, 사진촬영
6. 제보자명단
조사지역
이름
나이
성별
학력
기타
충주시 가금면
유정자
82
여
무학
17세 때 시집옴
충주시 가금면
이예순
76
여
초졸
18세 때 시집옴
7. 로마자 표기법은 문화관광부 고시 제 2000-8호 (2000. 7. 7)를 따름.
Ⅱ. 서 론
이번 답사를 계획할 때에 초점을 둔 것은, 충주지방의 방언에서 고어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으나 실상 그것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충주지방이 삼국의 지배를 번갈아 받아, 삼국 각국의 언어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리라 추측할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번 답사에서는 현지사람들의 언어생활을 통해 충주 방언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하였고, 본고 역시 충주 지방 방언의 특징을 정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방언의 특징을 알아보기에 앞서, 답사지역 충주지방의 역사와 전설에 관해 살펴보았고, 충주 방언의 특징은 음운 문법 어휘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Ⅲ. 본 론
1. 충주의 역사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의 일부였으나, 후에 백제의 판도 확정으로 한때(근초고왕 5년 A.D 350년경) 백제의 영역으로, 낭자곡성(娘子谷城)으로 불렸다. 그리고 북방의 고구려 남진 정책으로 인해 장수왕 63년(A.D 475)에 고구려에 전속되어 국원성이라 불렸다. 그 후 신라의 북진 정책으로 진흥왕 14년(A.D 553)에 신라에 편입되어 경주의 귀척자제와 6부호민을 옮겨 살게 하고, 진흥왕 34년(A.D 573)에는 소경부(小京府) 또는 사천성(四川省)이라 칭하여 대번영을 이루었다. 그리고 신라 경덕왕 원년(A.D 742)에 중원경(中原京) 또는 태원(太原)이라 칭하여 신라의 중앙임을 표방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중원경을 충주로 개칭(A.D 924)했고, 고려 성종 14년(A.D 995)에는 중원도를 설치하고 절도사 및 창화군 300명을 배치(현 앙성면 용대리)하였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 3년(A.D 1281), 충주성을 개축할 때 성벽에 연꽃을 조각하였으므로 예성(蘂城)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태조 원년(A.D 1392)에는 고려시대의 군명 예성을 그대로 존치하고 목사를 배치하였고, 세종 31년(A.D 1449)에는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충청도(忠淸道)라 개칭하고 좌감사를 배치하였다. 이후 세조 3년(A.D 1457)에 충주진영(忠州鎭營)이라 개칭하고 전국을 7도로 분할하고, 충주영장으로 하여금 단양, 영춘, 제천, 청풍, 괴산, 연풍, 음성, 청안 등 8군의 군정 사무를 장악하는 중심지로 만들었다. 명종 5년(A.D 1550)에는 유신현으로 강등하였으나, 다시 선조원년에 충주진영으로 회복되기도 했다.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을 당하자 신입 장군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8천의 군졸을 거느리고 왜적과 대적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패전하였다. 이 후 542년 동안 내우외환을 간접적으로 받으면서 충원현, 또는 충주목으로 불리어 오다가 고종32년에 행정을 개혁하고,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충주목사를 폐하고, 충주는 도청소재지로 관찰사를 배치하여 충청도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어 도청 소재지로 된지 14년 만에 교통의 불편을 이유로 순종 융희3년 5월에 도청을 청주로 이전하고, 충주는 군청 소재지로 군수를 배치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1913년 군면 폐합으로 충주는 충주군 읍내면에 속하다가, 1917년 충주면으로 개칭하게 된다. 그리고 1931년 5월에 지방제도의 개정에 의하여 충주읍으로 승격한 후,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된 지 12년만인 1956년 7월8일 충주읍은 충주시로 승격되고, 살미면, 이류면, 주덕면, 신니면, 노은면, 앙성면, 가금면, 금가면, 동량면, 산척면, 엄정면, 소태면의 12개면은 충주군에서 중원군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63년 1월1일 행정구역 변경 조치에 의하여 괴산군, 상모면이 중원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73년 7월1일 행정구역 변경조치에 따라 이류면과 하문리는 괴산군으로, 신니면과 광월리의 일부는 음성군으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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