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타이라노 키요모리
겐에이(元永) 원년(元年;1118년) 이세 헤이씨의 두령이었던 타이라노 타다모리의 장남으로 이세에서 태어났다.
다이지(大治) 4년(1129) 종 5위하 좌병위좌에 서임되었다. 규안(久安) 2년(1146) 부친 타다모리는 해적토벌의 공적으로 형부경으로 승진하여 이전 벼슬을 키요모리가 물려받아 종 4위하 중무소보 겸 아키노카미(安藝守)가 되었다. 세토내해(瀨戶內海)의 제해권을 손아귀에 쥐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며, 부친과 함께 서국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닌페이(仁平) 3년(1153)에는 타다모리의 사후 교토의 이세 헤이지 일문의 두령이 되었다.
호겐 원년(1156)의 호겐의 난 시기에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함께 고시라카와 천황측에 가담하여 승리를 거두고 고시라카와 천황의 신뢰를 얻어 하리마 노카미, 다자이다이쇼(大宰大式)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키요모리는 후지와라노 노부사이와 손을 잡고 권력의 강대화를 꾀했다. 이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1159년의 헤이지의 난이라 불리는데, 이 난에서 키요모리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을 주살하고 거기에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히라을 시작으로 수많은 겐지 일족을 처형하지만 요시토모의 3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을 이즈국에 유배시켰다. 이 난의 진압으로 인해 키요모리는 무가정권 수립의 기초를 쌓았다고 일컬어지게 된다.
그 후 처음에는 니죠(二條)천황의 친정을 지지했으나 아내 타이라노 토키코의 누이동생이었던 타이라노 시게코와 시라카와 상황사이에서 노리히토 친왕이 태어나자 헤이케 일족사이에서는 노리히토 친왕의 즉위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이에 반발하여 니죠 천황이 타이라노 토키타다에게 유배형을 내렸기 때문에 키요모리도 차츰 고시라카와 상황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니죠 천황이 급사하자 키요모리는 상황과 모의하여 노리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만들었다.
1166년에는 정 2위 춘궁대부에서 내대신으로 승진을 계속하여 1167년에는 무사로써는 처음으로 유래가 없는 좌대신, 우대신을 거치지 않고 이례적으로 종 1위 다이죠 다이신이 되었다. 말하자면 키요모리는 무사로써는 처음으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해 낸 것이다.
키요모리는 권세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타카쿠라 천황에게 자신의 딸인 타이라노 도쿠코를 시집보내고 천황의 외척이 되었다. 거기에 키요모리는 딸 타이라노 모리코를 싯간케(攝關家)의 후지와라노 모토자네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많은 자녀를 유력 공가집안 등에 시집보내는 등 혼인정책을 구사하여 교묘히 권력을 확대해 나아갔다. 그러자 이 키요모리의 세력 확장에 대해 고시라카와 법황을 시작으로 하는 원정세력은 불쾌감을 느끼게 되어 차츰 키요모리와의 대립이 깊어지게 되었다. 1177년 6월 시시가타니의 음모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타다 유키쯔나의 밀고로 발각되었으나 이것을 계기로 키요모리는 원정에 있어서 원근신의 배제를 꾀했다.
지쇼우(治承) 3년(1179) 이 해는 키요모리에게 불행의 연속이었다. 6월에 딸 모리코가 사망했다. 그런데 모리코가 사망하자 법황은 즉시 모리코의 장원을 키요모리와 상담도 하지않고 몰수하였다. 설상가상으로 7월에는 키요모리의 장남으로 키요모리가 후계자로써 기대하고 있던 타이라노 시게모리가 42세로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키요모리도 낙담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으나, 법황은 시게모리의 사망과 동시에 키요모리에게 아무런 상담도 하지 않고 시게모리의 지행국이었던 에치젠국을 몰수하고 말았다.
키요모리는 법황이 자신을 무시하는 시책에 기어코 격노하여 11월 14일 후쿠하라에서 군사를 이끌고 직접 상락하여 15일에 쿠데타를 결행했다. 이것이 바로 지쇼우의 쿠데타라 불리는데, 키요모리는 이 쿠데타에서 원근신이었던 후지와라노 모토후사를 시작으로 반 헤이케인 공가, 약 39명의 임관을 모두 해임시키고 대신하여 친 헤이케인 공가를 임관시키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법황은 두려움을 깨닫고 키요모리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키요모리는 이것을 용서하지 않고, 11월 20일에 법황을 유폐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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