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시적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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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시적 계시
우리는 종교와 시를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고자 노력하며 또한 스스로의 고유한 모습을 실현하는 가능성을 성취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 이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인데,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시 언어는 리듬과 이미지로, 종교적 언어는 신의 현현(顯現)과 제식으로 구체화되어 갈라서게 되는가에 대한 물음이 있지만 그 명확한 구분에 대한 해답은 없다.
신성(神聖)은 초자연적인 경험에도 있지 않고, 수많은 종교적 개념에도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합리적 선험성으로 여겨지는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자동적으로 신성의 개념에서만 성립될 것이다. 오토는 신성이 통합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합리적 술어는 어떤 면에서는 발판이 되지만, 신성이 이를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속성을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신성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경험이다. 다시 말해, 두려운 무엇으로 이끌리는 경험인 것이다.
신성은 인간 속에 내재한 신격화 성향의 발현이다. 우리는, 선험적 관념의 유현한 내용이 성장함에 따라 자기 자신과 대상물을 의식하려는 일종의 ‘종교적 본능’의 출현을 목격하게 된다. 오토의 정의는 노발리스의 금언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내부에서 신이 드러난다는 생각과,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현현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인간 내부에 잠재된 신격화 경향 때문에 우리가 신을 보게 된다는 생각은, 동시에 신성을 오히려 인간 주체성에 종속시키면서 그 존립 기반을 흔드는 것이 되지 않을까?
다른 한편, 종교적이거나 신격화 성향을 다른 성향들, 그 중에서도 시적 성향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신성의 특이점은 그 우선성에 있다. 성스러움은 근원적 감정이며, 이로부터 숭고함과 시적 감정이 유래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것을 고려할 때, 신성함이 다른 모든 경험보다 우선하면서 근원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선험적인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추정하게 된다. 우리가 그 선험적 영역을 고집할 때마다, 신성의 경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경험 속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경험들을 서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을 이루는 요소들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이다. 시인의 언어와 신비주의자들의 언어를 구별하는 특별한 색조는 그 말이 지향하는 대상에 달렸다. 외적 대상들을 신성화의 목록 속에 기록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저 희미한 내적 본능이다. 결론적으로, 신성의 영역을 다른 영역들과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 것은, 그것을 가리키는 대상이나 지시체 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대상이란 것도 경험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모든 길이 끊어졌다. 선험적이라는 관념이나 범주를 포기하고 신성이 인간에게 탄생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수밖에 없다.
신성한 공포는 근본적인 낯설음 속에서 싹튼다. 놀라움은 일종의 자아의 왜소화를 가져온다. 인간은 자신을 거대함 속에서 길 잃은 미약한 존재로 느끼고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작다는 감정은 비참함의 감정으로 이어지고 슐라이어마허는 이 상태를 ‘의존의 감정’이라고 불렀다. 스스로의 감정과 무엇에 대한 의지하고픈 마음에서 신성의 관념이 태어난다. 우리들의 근원적인 감정(피조물 상태)이 우리들의 유한성과 왜소함의 어두운 의식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창조자의 얼굴과 대면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주를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이렇게 근원적 감정의 중요하고 특징적인 요소이다. 오토는 의지의 감정에서 신의 개념을 추출했으며, 슐라이어마허는 신성함을 피조물의 근원적인 상태로 여겼다. 여기서 ‘피조물의 상태’란, 신학적인 의미를 탈색하면, 바로 하이데거가 부른 “그 곳에 처해졌다는 섬뜩한 느낌” 이다. 또한 왈렁스는 “근원적 상태의 느낌은 우리들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을 정서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신성함의 영역은 피조물이라는, 태어났다는, 그리고 매순간 태어났다는 그런 근본적인 상태의 정서적 계시가 아니라 그 상태의 해석이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계시의 의미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이제 결론 내릴 수 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며 그것을 알고 느낀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는 모든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유한성이라는 형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우리의 근원적 비참함과 대조적으로, 신성은 자신의 성스러운 형태에 존재의 충만함을 담는다. 성스러운 것은 ‘장엄한 것’인데, 이것은 선과 도덕의 개념을 초월한다. 원죄, 보상, 속죄 같은 개념들은 장엄한 것이 피조물에게 느끼게 하는 이 복종의 감정에서 싹터 나온다. 원죄 개념에서 구체적인 잘못이나 어떤 다른 도덕적 영향을 찾는다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원죄는 우리들의 잘못과 죄악보다 선행한다. 그것은 도덕보다 앞서는 것이다. 또한 속죄와 긴급한 구원의 필요성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근원적인 ‘결핍’에서 싹터 나온 것이다. 우리들은 부족한 존재들이고 그러한 부족함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원죄란 부족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결핍’과 ‘부족한 존재’가 원죄와 동일어가 된다고 추론할 만한 근거는 없다.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를 신이라는 충만한 존재와 마주 세우면서, 종교는 영원한 삶을 상정했다. 이렇게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했지만, 지상의 삶을 긴 고통 속으로 근원적 결핍에 속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종교는 우리로부터 죽음을 빼앗으면서 불가분의 관계인 삶도 빼앗았다. 영원한 삶의 이름으로, 종교는 이 삶의 죽음을 확인한다.
종교처럼 시도 인간의 원초적 상황, 즉 인간이란 잔혹하고 냉담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시 언어는 이 땅 위의 삶을 긍정한다. 시편 개개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시적 행위, 시를 쓰는 일, 시인의 언표는 어떤 해석이 아니라 본래부터 인간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적 언어는 리듬이며 끊임없이 솟아잘 아소생하는 시간성이다. 또한 시적 언어는 리듬이면서 삶과 죽음을 껴안은 이미지인 것이다. 그리고 리듬과 이미지가 표현하는 것은 단지 우리 행위, 뿐이다. 시가 원초적인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시를 쓴다는 것이 인간의 결핍 혹은 근원적인 결함에 대한 판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근원적 조건은 본질적으로 결함을 갖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우연적이며 유한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결핍’ 혹은 ‘부재’는 원천적인 것이지 후천적으로 연유되는 것이 아니며, 결핍 그 자체가 인간의 존재 방법이다. 시를 쓴다는 것이 진실로 인간의 원초적이고 영원한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부정적 사실이 결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혹은 무엇인가가가 결핍된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결핍된 그 어떤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이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삶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을 부적정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 삶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삶을 완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