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소월(金素月) - 민족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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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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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시인 김소월(金素月)
- 민족을 노래하다 -
목 차
Ⅰ. 생애 : 소월의 삶, 그리고 그 후
Ⅱ. 시대 : 소월과 1920년대
Ⅲ. 사유 : 소월의 시세계
Ⅳ. 감상 : 소월의 시와 그 의미
Ⅴ. 의의 : 소월과 우리
- 참고문헌
김소월이란 인물은 소위 ‘수능 세대’라 일컬어지는 이들에게 있어서 결코 낯설지 않다. 비단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의 이름과 작품에 대해서 알고 있다. 설령 그 이름은 모른다할지라도, ‘진달래꽃’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자신 있게 김소월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것은 김소월의 작품 텍스트 혹은 2차 창작물일 뿐이다.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왜 그런 작품을 지었는지, 어떤 세계를 지니고 있는 지 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과연 김소월은 어떤 인물인가? 나라 잃은 시대가 배출해낸 민족의 ‘천재’인가 아니면 비관적 현실에 굴복한 채 자살을 택한 ‘의지박약’인가?
잘 안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그와 우리 사이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며 본 리포트를 전개한다.
Ⅰ. 생애 : 소월의 삶, 그리고 그 후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음력 1902년 8월 6일 평안북도 정주의 공주 김씨 문중의 장손으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 소월의 별명은 ‘갓놈’으로, ‘갓 낳은 귀여운 아기’라는 뜻이다. 소월이 명랑한 성격에 총명했기에 귀염둥이 대신으로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그는 대갓집의 장손으로 태어나 많은 기대와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김성도(金性燾)가 철도 공사장에서 일본인들에게 개통도 안한 철길을 조선 놈이 먼저 건넜다고 폭행을 당해 정신질환을 앓게 되면서, 공주 김 씨 가문 및 소월에게는 암울한 영향력이 미치게 된다. 소월은 광증을 보이는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소월은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할아버지가 개설한 독서당에서 한문수학을 받다가 남산학교에 입학하였다. 남산학교는 공주 김 씨 문중에서 세운 학교로, 은연중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여 민족지도자인 이승훈이나 독립운동가인 소월의 큰 고모부 김시참 등이 강연을 하기도 했다. 소월은 남산학교 시절을 통해 피압박 민족에 대한 막연한 자각을 하게 되었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 중학부에 진학한 소월은, 안서 김억(金億) 시인이자 평론가. 한국 최초의 근대시집 『해파리의 노래』의 저자.
과의 만남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된다. 소월의 대표작 「가는 길」, 「진달래꽃」, 「접동새」, 「엄마야 누나야」 등은 이미 오산 시절에 쓰인 작품들이다. 오산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6년, 소월은 할아버지에 의하여 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1919년에 첫 딸을 얻었고 그 해 터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그 후 오산학교는 31운동을 이유로 폐교하게 된다.
소월은 1920년, 『창조』의 동인이었던 김억의 추천으로 『창조』 5호에 「낭인의 봄」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처음 등장하였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오산학교의 폐교 후 배재고보에 편입한 소월은 졸업 후 1923년 3월, 동경유학길에 올라 일본 도쿄 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상과대학으로의 진학은 시를 쓰되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종가를 대표하는 장손으로서의 책임감의 발현이었다. 그러한 입신의 꿈은 몇 개월간의 방탕한 생활과 피압박 민족의 설움으로 4~5개월 만에 끝나고 만다.
고향으로 돌아온 소월은 1925년 그의 첫 사업으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했으나 경영 미숙으로 사업이 부진하였고, 그 이후 동아일보 지국에서 손을 떼고 고리대금업을 시작했으나 그 역시 이리저리 돈만 떼이고는 실패했다. 현실적 빈곤에 대한 비관으로 소월은 부인과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 특별한 직업도 없이 논밭을 팔아가며 술 마시는 일에만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