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동명의 생애와 활동
초허 김돔명은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노동리 지금은 강릉에 편입됨.
에서 1900년 4월 4일에 김제옥, 평산 신씨의 슬하에서 독자로 태어난다. 초허는 8세 까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극빈한 가정형편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강릉에서 한문을 익혔고 원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그의 나의 20세에 함흥소재의 미션계 학교인 영생학교를 졸업하고 흥남에 있는 동진소학교와 평안남도의 강서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22세에는 시를 쓰던 현인규를 지우로 하여 문학에 발을 디디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개벽』지 10월호에 최초의 시 을 발표했고 같은 해 , , ,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1928년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신학과와 일본대학 철학과를 동시에 다녔다. 이 때 그는 고학이었는데 그런 여건을 무릅쓰고 두 대학에 적을 두고 밤낮으로 공부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굳은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8년간 동광학원장을 지내면서 그의 시는 새로운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상실된 조국이었다.
1930년 등단 이 후 작품을 모아서 시집 『나의 거문고』를 내었다. 1936년 두 번째 시집 『파초』를 내었다. 이 시집으로 민족시인으로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했다. 1938년 동광학원을 그만두고 해방이 되기까지 숯장수와 나무장수로 전전하면서 치욕스런 일제의 암흑기를 버텼다. 그리고 1942년 를 끝으로 붓을 꺾었다.
해방이 되자 흥남중학교장을 맡았고 1946년에는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 함경남도 위원장을 하였으나 공산당의 협박에 못 이겨 1947년 38선을 넘어 월남하였다. 초허는 월남한 그 해 시집 『하늘』과 『38선』을 내었다. 6.25를 거치고 1953년에 다시 다섯 번째 시집 『진주만』을 내어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월남 이 후 이화여자대학교에 교수로 있으면서 1955년에는 정치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한 평론집 『적과 동지』를 내었다.
1957년에는 여섯 번째 시집 『목격자』를 출간했고 다음 해는 정치평론집 『역사의 배후에서』, 1959년 수필집『세대의 삽화』를 계속 발표했으며 1960년에는 참의원으로 의정에 나아갔다. 1965년 그의 생애와 예술을 정리한 김동명 문집 3권을 내고 1968년 1월 20일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고 다음날 타계했다.
2. 작품경향
초허의 경향은 크게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초기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인 , 의 시기로 볼 수 있다. 3·1운동을 실패와 세기말적 사상 등의 영향으로 감상적·퇴폐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다음 중기는 『파초』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아름다운 자연에다 어두운 시대 상황과 인생무상, 역사적인 고뇌와 이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인생관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후기는 붓을 꺾었다 다시 쓴 정치적·사회적 경향의 작품들이다. 이 무렵의 작품은 중기 시에 비해 작품 수준이 떨어지고 거친 표현이 많이 나타난다. 월남하기 전 공산 치하에 있던 우울한 이야기로 민족의 참상을 표현하거나 일제의 암흑상, 풍물적인 사회시로 회고의 정, 향토색, 피난시절 등을 나타내고 있다.
3. 작품세계
1) 초허의 데카당스 퇴폐주의. 타락 또는 퇴폐의 뜻으로 쓰이나, 문예사조상으로는 이상을 몰각하고 전통을 무시하는 일종의 염세적인 인생관으로 세계고(世界苦)의 감정에서 병적 신기(新奇)와 미에 탐닉하는 일파의 사조를 일컫는다.
초허가 22세 때 친구 현인규에게서 보들레르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시인. E.A.포를 번역소개하였고, 대표작은 이다. 랭보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낭만파고답파에서 벗어나, 인간심리의 심층을 탐구, 고도의 비평정신을 추상적 관능과 음악성 넘치는 시에 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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