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리얼리즘과 자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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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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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리얼리즘과 자연주의
서문
1850년대를 전후하여 프랑스 문학의 기류는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1815년에서 1830년에 이르는 동안 한 문학유파로서 조금씩 확립되어 갔던 낭만주의는 그 후로 결속된 한 운동으로서의 힘을 상실하였다. 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것에 대한 객관적 접근법으로서 다가올 새 문학을 예고했다.
1.리얼리즘
-리얼리즘과 자연주의
문학사상,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은 1850-1860년대에 상플뢰리와 뒤랑티에 의해 주창된 한 문학적 이념을 가리킨다. 우리는 세계의 문학사를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찾아 볼 수 있다. 피에르 코늬는 고대의 서사시에서 중세의 서민문학을 거쳐 근대의 갖가지 문학형태에 이르기까지 리얼리즘의 흐름을 리얼리즘과, 또 하나의 대응적 전통을 이루는 이상주의(또는 관념주의)가 “끊임없이 서로 싸우며 동일한 승리와 패배를 안고 영원히 공존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문제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이 리얼리즘이 문학 가운데 주도적 경향으로 나타날 때마다 각기 그 시대의 특이한 색조를 띠게 됨으로써 다른 시대의 것들과 명백히 구별되는 데 있다. 이 명칭은 새 문학의 일반적 성격을 의미할 뿐 그것의 특수하고 한정된 요소들- 한 시대의 모든 지적 정서적 갈등과 윤리적 고뇌와 그것들의 해결 시도가 그 안에 메아리치는 이 요소들, 따라서 우리가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요소들을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플로베르, 공꾸르 형제, 졸라 등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형태의 소설문학이 이 시대의 매우 특이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태어났고 이 세대의 지적 모험의 한 문학적 연장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소설들은 분명히 리얼리즘이라는 공통분모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동시에 19세기의, 아니 19세기만의 산물이며, 여기에 붙여진 이름이 곧 이다.
리얼리즘과 자연주의에 공통되는 것은 외적 진실에 대한 우선적 관심, 그리고 이 진실의 재현을 기본원리로 삼는 태도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주관적 진실을 추구하며 모든 대상의 상상적 변형을 미학의 원리로 삼는 낭만주의적 태도와 대립된다. 리얼리스트들은 일상적 삶 속에서 범상한 것들을 소재로 삼으며 이것들을 관념이나 상상의 개입 없이 본래의 진실성 가운데 재현하는 미학적 이상을 추구하였다. 자연주의는 이 이상을 승계한다. 뿐만 아니라 보다 충격적인 소재와 정밀한 세부 묘사와 일상적인 어휘 등을 써 리얼리즘의 강화된 형태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자연주의의 특수성은 리얼리즘의 일반적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주의는 그 자체의 독자적인 이론과 방법을 갖춤으로써 리얼리즘과는 다른 하나의 문학 유파, 문학 운동으로 발전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자연주의는 리얼리즘보다 한결 구체적이고 한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샹플뢰리와 뒤랑티의 리얼리즘
1850년대의 리얼리즘을 논하려 할 때 우리가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이 말이 과연 어떤 작가들 또는 예술가들에게 적용되는가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은 데 기인한다.
그러나 프랑스 문학사에 있어 리얼리즘이 19세기 후반 자연주의에 앞서 하나의 문학적, 더 광범위하게는 예술적 유파로 등장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은 샹플뢰리와 뒤랑티에 의해 주도되었다. 화가로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있다.
샹플뢰리(1821-1889)가 처음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847년에 발표한 그의 소설 chien-caillon에 의해서였다. 이 소설은 예술가들의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그리고 있다. 샹플뢰리는 전위적 성격의 신문 《팜프레》지에 미술평론을 썼는데, 바로 이때 귀스타브 쿠르베와 만나게 되었고, 이로써 리얼리즘은 문학과 예술 양면에서 동일한 움직임을 펼쳐나갔다. 쿠르베가 이름을 얻기 시작한 것은 1849년 『오르낭의 저녁식사 후』와, 특히 다음해의 『오르낭의 장례식』에 의해서였다. 특히 『오르낭의 장례식』은 한 마을의 평범한 광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리얼리즘 화풍의 전형과 같은 것이었다. 그 후, 작품이 나올 때마다 거센 논란이 일었고, 1855년에는 다시금 만국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이 거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쿠르베는 몽테뉴에서 개인전을 열어 《리얼리즘 전》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카탈로그 안에 리얼리즘 예술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