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엘리트와 민중
지난 2008년, 1948년 8월 15일을 우리나라가 건국하게 된 건국절로 지정하자는 여론이 생겼었고 정부도 그 여론을 지지해 건국60주년 기념 사업회 기념행사를 개최한 일이 있었다. 당시 야당의 반발은 물론 많은 국민들의 반대로 건국절 지정여론은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단체,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번 논문인 ‘건국’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의 주제가 그러한 것일 거라고 예감을 하며 글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예감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승만의 집권과 그 활동에 대해 분노가 차올랐고 건국절 주장에 동의했던 정부보다 더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됐다.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정치체제 하에서든지 일반 국민들이 약자라는 것을 말이다. 돈 없고, 배우지 못한 게 죄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도 가진 자들은 얼마든지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면서 그들의 권력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새로이 수립된 정부에 의해 그 권력들이 유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민중들은 더 핍박받고 불안한 세월을 지내야만 했다.
어떠한 사람들은 미군정기를 보내고 또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면서 우리 헌법이 내걸고 있는 ‘민주공화국’의 토대가 만들어졌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헌법적으로 보통선거, 복수정당제도, 의회 제도를 도입했고, 삼권분립을 명시했으며 영장제의 도입 등으로 인신보호제도를 갖추었다.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제도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민중의 현실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는 것이 그 문제점이다. 이러한 ‘남’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은 객관적인 자료, 공식적인 자료를 통해서보다는 일반 민중들의 기억, 언어, 구술을 통해 더 자세히 획득할 수 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당시 조선인들이 만나는 국가는 경찰이었다고 한다. 경찰이라는 무력집단이 서슬 퍼런 눈으로 국민을 감시하고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잡아가는 상황 속에서 과연 그 경찰을 통제하는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묻고 싶다. 오히려 그러한 경찰의 만행을 뒤에서 움직였던 것이 국가였고 또 청년단이라는 법 외부의 집단을, 국민을 이념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 당시 국민들에겐 경찰과 청년단이 곧 법이자 국가였다.
어떤 이들은 UN의 5·10선거 결정 및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국민들에게 별다른 대가 없이 ‘희생과 봉사’를 요구할 자격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6·25전쟁에서 이러한 나라의 요구에 국민들이 부합했으나 국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뿐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국민을 속인 채 자신만 피난을 갈 수 있느냐는 말이다. 오히려 다시 서울을 되찾은 후, 피난가지 못했던 국민들을 북한군에게 도움을 줬다며 탄압하는 집단들을 어물쩍 인정하며 넘어가고,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를 부추겼던 것이 국가, 바로 이승만 정권이었다.
이승만 정권 하에 경찰, 공무원들은 비리의 온상이었고 이러한 것들은 국민들에게 박탈감을 줬음은 물론, 국민들의 기본적인 생활마저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렸다. 이러한 이승만 정권하에서 선거가 몇 차례 반복됐고 이로 인해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초가 공고해졌다는 주장은 정말 어불성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언급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3·15 부정선거는 그러한 주장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큰 추럭 뮈시기 해갖고 여자들 저그 집안, 구성리 가면 자작일촌이여, 한 70호 살어. 거그 구성리가 아주 깊은 마을이여. 암두 몰라. 거기 여자들 싹 동원해 가지고 첨에 치마입고 한 번 하고, 몸빼 입고 와서 한 번 하고, 뭐 누구 자유여, 그 대리투표가.
이러한 불법선거가 자행되었는데도 과연 민주주의의 기초가 공고 해졌는가 반문하고 싶을 뿐이다.
법이 있어요? 법도 없어요. 죽으면 끝나는 거야. 사람들이 그냥 쏘면 죽는 거야. 비위 상해서 저 새끼 죽여 하면 사촌도 쏴서 없앴어. 서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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