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의 본령을 보여준 김영랑 시인 - 김영랑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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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준 김영랑 시인 - 김영랑의 생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준 김영랑 시인
1. 김영랑의 생애
(1)시인의 고향 강진
훗날 ‘1930년대 전반기 우리 시문학의 가장 큰 빛 1) 서정주의 평: 김현, 1981, 193
2)「시와 감상」(1938)에서 정지용은 영랑의 시를 통하여 비로소 전라도 사투리가 매우 곡선적이고,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의 하나로 찬사를 받게 되는 시인 영랑 김윤식은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군 강진면 남성리 탑골 마을의 북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영랑은 1909년 봄부터 북산골에 있는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11년에는 강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다. 그의 나이 열세 살 때인 1916년에 김은하와 결혼하였으나 다음해에 곧 사별하게 된다.
영랑의 생애와 문학에 있어서 그의 고향 강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영랑은 그의 생애 중에서 7년 정도의 유학 기간과 말년의 2년간 서울 생활을 제외하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향 강진 땅에 살면서 주옥같은 서정시를 써낸 대표적인 ‘강진시파’ 시인이다. 강진 지방은 남도 특유의 고유문화를 독자적으로 꽃피운 지역으로 강진 고을의 자연과 삶은 영랑의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강진의 ‘이상적 남국 풍토’는 영랑의 시문학을 탄생시킨 모태에 해당되며, 「찬란한 슬픔의 봄」(1981)이라는 글에서 비평가 김현이 평한 바와 같이 전라도 사투리는 영랑의 시에 적절하게 수용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중요한 자산으로 자리 잡게 된다.
(2) 휘문의숙 재학 시절
1916년 2월 초에 상경하여 1년 정도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한 바 있는 영랑은 이듬해인 1917년 3월 휘문의숙에 진학하게 된다. 3학년 재학중이던 1919년 봄에 영랑은 3*1운동에 가담한 죄로 일본 경찰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석방된다. 그리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지만 그곳에서도 독립 만세운동을 모의하다가 검거되어 대구형무소에 복역하다가 석방되는 등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해 가을에 결국 휘문의숙을 중퇴하기에 이른다.
휘문의숙은 영랑의 문학적 생애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문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중등 교육기관이었다. 영랑이 재학하고 있던 1910년대 후반기 당시 휘문숙에는 장래 우리 문단을 이끌게 될 우수한 인재들이 여러 명 재학하고 있었다. 영랑의 바로 위 학년에 박종화가, 그 위 학년에는 홍사용이 있었다. 그리고 영랑의 바로 아래 학년에는 정지용이, 그 아래 학년에는 이태준이 재학하고 있었다.
휘문의숙 출신 문인들과 함께 1920년대 이후의 우리 문단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또 다른 학맥으로 배재고보 출신 문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나도향, 김기진, 박영희, 박용철, 김소월 등이 대표적인 배재고보 출신 문인들이다. 그러나 전남 광산 출신 박용철(1904~1938)은 오히려 휘문의숙 출신이었던 영랑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동경 유학 시절에 영랑과 박용철은 청산학원 중학부 동기생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3)동경 청산학원 중학부 유학 시절
1919년 가을 휘문의숙을 중퇴한 영랑은 고향 강진에 내려가 지내게 된다. 그해 10월 하순경에 영랑은 금강산을 여행하게 된다. 1920년 9월은 영랑에게 있어서 생애 최대의 전환기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동경에 있는 청산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게 되며, 그의 문학적 동반자이자 최대의 후원자가 되는 박용철을 만나게 된다. 박용철과 같은 하숙방에서 지내면서 아주 친한 사이가 되고 이러한 깊은 우정은 당시 문학에 관심이 적었던 박용철로 하여금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1921년 7월 하기 휴가를 맞이하여 잠시 귀향한 영랑은 부모에게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승낙을 구했으나 완고한 아버지에게 거절당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랑은 훗날「여문백답」(1940)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는 점, 자기 지방의 소리에는 자신도 있다는 점 등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속적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