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에 철학을 도입하는 것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대립하고 있었던 그리스도교 사상계는 4~5세기 들어 교리 논쟁이 지속되면서 철학을 도입하여 교리를 확립하는 데 이용하자는 측이 우세해지고 있었다. 이때 교리를 확립한 이가 바로 최고의 라틴 교부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리(敎理)를 체계화하고 확립하는 데 공헌 한 학자들을 ‘교부(敎父)’라고 부르며, 교부들이 이룬 학문적인 성과를 교부 철학으로, 이들이 활동했던 2~8세기를 교부 시대라 부른다. 바로 이 교부 시대에 서양 문명의 두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융합이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작품
아우구스티누스의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아버지 파트리키우스와 어머니 모니카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교도였던 파트리키우스는 공명심과 물욕에 찬 전형적인 로마의 하급 관리였고, 그리스도교였던 모니카는 성품이 부드럽고 온순하며, 총명하고 인내할 줄 아는 어머니의 전형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서 인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부터 이질적인 두 요소, 즉 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긴장감을 지니고 태어난 셈이다.
어린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에게 종교 교육을 받았지만 당시 관습에 따라 그리스도교 세례는 받지 않았다. 아들이 자신보다 높은 관리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 덕분에 그는 카르타고에 가서 수사학을 공부할 수 있었지만 그는 공부보다는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이다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어린 나이에 아들(아데오다투스)까지 갖게 되었다. 아들이 생기자 아버지로서 책임감을 느껴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철학에 관심을 보일수록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문제들(신이 있는 세계와 어찌하여 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들이 존재하는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왜 부당한 불행이 닥쳐오는가 등)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그의 철학적 욕구들을 그나마 만족시켜준 것은 마니교 세상의 선은 선한 신에게서 유래하고 악은 악한 신에게서 유래한다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이 세상에서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끊임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선한 신이 승리하면 세상에는 정의와 평화가, 악한 신이 더 큰 힘을 얻으면 불의와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조인 마니Mani는 악한 신의 세력이 극도로 커졌을 때 악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선한 신의 사자들이 출현하며, 사자들 중에서는 붓다, 예수 등이 유명한 데 그중 가장 훌륭한 자가 자신이라고 했다.
였다. 악의 기원과 같은 문제에 대한 그들의 ‘합리적인’ 답변은 그를 사로잡았고, 세계 안에 있는 악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 때문에 고민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서 이를 해명할 수 있는 그럴듯한 핑계를 발견한다. 21세가 되던 374년에 그는 타가스테로 돌아와 마니교 교사로서 1년 넘게 문법과 라틴 문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절친했던 친구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반문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로 돌아가 공부를 했고, 공부를 마친 후 카르타고에 수사학 학교를 세워 약 7년 정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마니교의 독단적인 주장들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얼마 동안 아카데미아파의 회의론에 호감을 느꼈다. 증명할 수 없는 불확실한 내용을 주장해서 오류에 빠지기보다는 일체의 ‘판단을 중지(에포케epoche)함으로써 오류를 피할 수 있다는 피론Pyrhon의 주장이 매혹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악의 기원과 인간의 불행에 관한 질문에 해답을 얻지 못하고 회의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친구의 초청으로 밀라노로 가서, 본격적인 수사학 교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줄기 빛을 만난다. 첫째, 플로티노스Plotinos의 를 비롯한 일련의 신플라톤주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혀왔던 철학적 문제들을 풀어낼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 세게 너머에 진리의 영원한 정신적 영역이 있으며, 이는 인간 정신의 대상이자 인간이 온 힘을 기울여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339?~397)와 만나면서 자신의 성서 해석 방법과 함께 지금까지 품고 있었던 그리스도교 성경에 대한 편견을 버린다. 그 결과 그는 신플라톤주의에서 찾은 영원한 진리를 그리스도교의 신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회심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속적인 명예를 추구하던 자신의 삶은 모두 덧없어 보였다. 그는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수사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밀라노 근교의 한 별장에서 약 6개월 동안 어머니 모니카와 친구들과 함께 토론과 명상을 하면서 세례를 준비한 후,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한 후에도 철학에서 발견했던 좋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것을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철학을 독립된 학문이 아니라 신을 탐색하고 신앙의 진리들을 관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했다.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열병에 걸려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 타가스테에 도착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부모의 가산을 정리해 토론과 명상생활을 위한 일종의 수도 공동체를 만들었다.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391년에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히포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발레리우스Valerius 주교와 시민들의 간청에 마지못해 사제 서품을 받고 교구 사제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395년에 발레리우스 주교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