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일련의 사건들로 살펴 본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거문도 점령~영일동맹까지)
3. 제1차 영일동맹(1902)과 제2차 영일동맹(1905)의 차이
4. 헤이그 평화회의
① 제1,2차 헤이그 평화회의
② 1907년 황성신문(6월-8월)을 통해 본 영국과 평화회의
㉠ 1907년 6월
㉡ 1907년 7월
㉢ 1907년 8월
5. 결론
1. 서론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1907)는 열강의 군비경쟁으로 인해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개최되었다. 무장평화의 불안정성이라는 문제가 인식되고 있었음에도 열강이 스스로 군비를 축소할 의지가 없었으므로, 결과적으로 군비축소 의도는 실패하고 전투에 있어서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에만 합의하는 형태가 되고 말았다. 1907년에 영국을 비롯한 3국협상(영,프,러) 세력이 군비축소안을 가지고 독일을 압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독일은 이에 반발하였고 이러한 대립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나타났다.
세계에 대해서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거문도 점령을 계기로 한반도에,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거문도 점령부터 영일동맹까지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시종일관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러시아’와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여기에 동맹이었던 청국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영국의 파트너는 신흥강대국 ‘일본’으로 대체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 지식 하에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 제1,2차 영일동맹, 그리고 1907년 황성신문을 통해 본 영국과 평화회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 일련의 사건들로 살펴 본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거문도 점령~영일동맹까지)
거문도 점령은 한반도를 본격적으로 국제정치에 편입시킨 사건이었다. 이는 당시 세계 패권을 두고 격돌하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벌인 축소된 형태의 패권다툼이었다. 황남기, 「거문도 사건」『고시계』443호, 1994, p352.
김종헌 김종헌, 「왜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했나?」『내일을여는역사』26호, 2006, pp151-153.
은 기존 연구에서 말하는 거문도 점령의 원인을 부정하면서, 이에 대한 이해로 당시 유럽 정세를 제시하였다. 당시 러시아가 사용할 수 있었던 해로로는 발트해와 흑해에서 지중해로 가는 것이 있었다. 발트해는 독일, 프랑스, 영국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후자를 택하였다. 후자를 이용하려면 발칸반도를 점령해야 했다. 이를 위하여 터키와의 전쟁도 감수하였는데, 러시아의 이와 같은 행위가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를 위협하였다. 영국은 터키와의 비밀 동맹으로 이를 저지한다. 지중해로의 길이 막힌 러시아는 중동지방을 표적으로 삼았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페르시아가 인도의 방어막이 되어주길 바랬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軍을 지원하여 러시아를 상대했다. 이때가 1885년 3~4월 초이다. 이 때 러시아는 이와 같은 문제가 극동에서도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를 사수하려 했다. 이에 맞서 영국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할 수 있는 기지를 찾았는데, 그 기지가 바로 ‘거문도’였다.
영국군의 실질적인 철수 원인은 거문도 점령의 계기가 되었던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1885년 9월 10일 두 나라는 아프가니스탄 협정을 체결하였다. 영국은 러시아가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청국에게 요청한다. 러시아도 거문도 점령의 의사가 없다는 것을 청국에게 알리자, 영국은 청의 보증을 담보로 거문도에서 철수한다. 김종헌, 위의 논문, pp158-159.
이와 같이 거문도 점령 때부터 영국은 동아시아에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주로 이 지역의 강대국이었던 러시아와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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