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femme 파탈
한국춤모임 짓 창작춤, 2009. 5. 21, 부산민주공원 소극장
세 여인들의 일상, 그 속에 매혹이 있다. 계속 거치적거리는 남자의 존재가 여자들과의 마찰 속에서 형태를 변형한다. 여성의 의도적 교태에 의해 무언가 파괴가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묘사되고 있다. 여자들의 움직임은 폭이 큰 노란 치마 끝자락에서 묻어나오는 태평무적인 발놀림과 남방춤의 상체 동작이 뒤섞여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여성 군무진의 빠른 혹은 유혹적 움직임이 도미노처럼 진행되는 동안 남자는 검은 베일이 쳐진 상자 속에 표정 없는 머리만 전시하듯 보여주고 있다. 안무자가 설정한 이 타인의 시선은 끈질기게 작품을 메워가고 있다. “날 잡셔유” 하듯 표정은 비워져 있고, 유혹의 바다에 빠져 꼼작 없게 된 영혼처럼 그는 상자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 끝내 교태로운 여자 무용수의 호흡에 빨려든 남자는 여자와 연결된 길고 검은 천 위로 굴러 나오게 된다. 여자들의 모아진 시선이 남자의 존재에 모아져 꽂히고 이것으로 남자는 헤어날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된다.
오늘날 성문화의 풍토를 고발하면서 인간의지의 나약함이 초래하는 개인의 파탈을 섬세하면서도 잔잔하게 그려나간 것으로 이해되어진 이 작품은 주제를 부각하기 위한 표현방법으로서의 성의 경계선에 더욱 돌진할 수 있는 과감함이 조금 아쉬움으로 남았다. 또 각 장면 사이의 접촉이나 탄력의 효과, 타인이란 설정과 이성 사이의 이중적 춤의 의미에 좀더 세심한 배려가 있었더라면 더욱 탄탄한 구조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더불어 사회적 존재로서 부딪히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의식의 거추장스러움을 드러내고 싶어 했던 안무자는 극장 내 타인과 자아의 시선을 분할 해 내는 명쾌한 공간설정을 좀더 고민했어야 했다.
1986년 창립된 짓 무용단은 1987년 창립공연을 시작한 이래 해마다 신인 등단 안무가전 형식의 소극장 무대와 중견 단원들의 작품들을 올리고 있다. 이들은 주로 개인과 사회의 시사적 문제들을 접근하며 안무 작업을 진행해 왔다. 지역의 동인 춤패로서 배김새 등과 더불어 꿋꿋이 방향각을 잡아 나왔으나 현시점 동인 춤패의 의미를 상실, 그 존재 유무마저 고민하는 지점에서 짓 무용단은 이번 공연을 통해 여전히 그 창작적 구조의 틀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성과를 올렸다.
이진주의 감각적 접근으로서의 은 2003년 박이슬의 에서 보여준 ‘성적 고뇌와 타인의 시선’이란 이미지를 회상시켜 주었으며 강한 색채미와 유혹적 움직임의 세밀한 장면들의 연계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녀의 대본 속 흐름은 신비-잔혹-매혹으로 진행되어야 했으며 -혹은 안무의 흐름이 시간적 혼돈을 주었는지- ‘죽음보다 강한 쾌락’은 안무보다 더 강한 문구로 느껴졌다. 글이나 음악이 주는 쾌락의 강렬함을 위한 움직임이나 치밀한 반전 등이 더욱 필요했을 것 같다.
신선한 아이디어는 있는데 그것을 계획적으로 배치하고 힘 있게 완결 구조로 끌고 갈 고립적 힘이나 치열한 사유의 과정이 부족했다. 또한 대부분의 신인 안무가들에서 느끼는 춤의 구질의 약함을 또다시 극장에서 생각하게 되는 아쉬움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한 번의 공연이 시작이자 끝이라는 생각으로 영혼을 싣는 트레이닝 과정이 요청되는 프로페셔널한 자세가 더욱 필요했다는 생각이다. 아슬아슬한 발들기 같은 동작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전체의 호흡을 따라가는 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또 부분적으로 장면과 장면의 연결에 있어 좀더 유기적 연관과 사유의 흔적이 고려되었어야 했는데, 이것은 굴곡 있고 탄력 있는 작품을 잉태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결핍은 아쉽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문제를 최대한 솔직한 어법으로 펼쳐나가려 했던 신인 안무가로서의 참신한 시도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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