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상화(想華), 상화(尙火), 무량(無量), 백아(白啞) 등 다양한 호를 가지고 있는 이상화(李相和)는 1901년 4월 5일 대구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큰형 상정(相定)과 동생 상백(相佰), 상오(相旿)가 있다. 상정은 독립 운동가이자 중국군 사령부의 장군이었고, 상백은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상오 역시 문무를 겸비하여 문학 활동을 하기도 했고, 이름난 수렵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형제들의 비범함에 가려 이상화란 인물의 존재가 미약해 보이긴 하지만, 그의 문학적 자취는 근대 문학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1908년,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밑에서 자랐다. 큰아버지 이일우는 300석 지주로 대구에서 알아주는 대부호이자,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한 위인이다. 민족주의자이자 지사(志士)의 면모를 갖춘 이일우의 밑에서 수학함으로써 이상화는 학문적 기반과 그 성격을 닦아나가기 시작한다.
1915년에 서울로 진학하여 정교 교육 기관인 경성중앙학교를 다니게 된다.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으나 학업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 고향 친구 현진건, 백기만 등의 증언이다. 이상화 전집, 윤장한(p.269)
그러한 방황 끝에 1918년 학교 3년을 수료하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 시기에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에 참여하게 되지만, 이 때의 자료는 현전하지 않는다. 갈등과 고뇌에 불면증까지 겹쳐, 그 해 7월에 가출하게 된다. 강원도 일대를 3개월간 방황하고 돌아온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다. 이상화는 대구에서 거사 모의에 참석하였다가, 주요 인물들이 검속되자 서울 박태원(朴泰元)의 하숙집으로 피신하여 화를 모면하게 된다. 이 때 박태원과 함께 기거하며 박태원의 인생과 예술에 관한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이상화 전집, 윤장한(p.270)
백부의 엄명으로 결혼한 뒤 다시 상경,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그 창간호에 시 「말세의 회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이 시기 그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주된 정조는, 당시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퇴폐적 낭만주의에 있었다.
1922년, 평소 꿈이었던 프랑스 유학을 가기 위한 기회를 잡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때를 기다리나,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괴로워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대학살 사건 이후의 충격으로 다시 귀국하게 된다. 이 시기, 그의 대표작인 「나의 침실로」가 창작된다. 이 후 그의 시 세계는 낭만주의적 경향에서 저항적인 민족의식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1926년, 그의 시 세계에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개벽(開闢)’ 동인지에 실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비음」, 「가장 비통한 기욕」,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극단」, 「선구자의 노래」와 같은 식민 시대의 비참한 민족 현실을 노래한 작품군이나, 「저무는 놀 안에서」, 「조소」, 「비를 다고」와 같은 빈궁한 사람들의 삶을 다룬 작품들, 「구루마꾼」, 「엿장수」, 「거러지」와 같은 경향적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1925년 ‘파스큘라’의 강연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그 해에 ‘카프(KAPF)’의 발기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가 경향 문학에 전도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식민 시대의 비참한 민족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가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1923년에서 1928년에 이르는 시기까지 그의 시작 활동은 활발하게 이어졌지만, 그와 반대로 갈등과 좌절, 퇴폐에 함몰되기도 한 시기였다. 그는 대구에서도 알아주는 귀공자였다. 이 시기에 그는 술과 사랑에 젖어 가산을 탕진하고 건강을 버린 것이다.
1928년 6월, 신간회 출판 자금을 위한 방편으로 부호 김교식을 권총으로 위협한 소위 ‘ㄱ당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게 된다. 1933년 강사 자격을 취득, 교남학교에 몸을 담았으나 곧 그만두게 된다. 1937년 중국으로 떠나 큰형 이상정 장군을 만났다가 유람 후 돌아온다. 다시 교남학교에 복직, 교가를 작사했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어 가택 수색을 당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시작 다수를 압수당하게 된다. 이런저런 고초를 겪고 나자, 그의 시작활동 역시 우울한 비애가 감돌게 된다. 「곡자사」, 「대구 행진곡」, 「반딧불」, 「역천」, 「나는 해를 먹다」등을 발표한다. 1939년 다시 퇴직하여 ‘국문학사’ 저술을 계획하다가, 1943년 위암 진단을 받고 3개월만에 사망하게 된다. 운명인 듯, 그날 친우 현진건 역시 타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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