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역사의 한 면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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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의 한 면을 보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제주 역사의 한 면을 보고
10월 26일 오후 1시. 대학교에 와서 현장답사라는 건 가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일단 수업을 빠지면서 가는 답사가 마냥 설레이고 기대되었다. 우리는 총4대의 차로 이동을 하였는데 처음 목적지는 바로 성산일출봉 일본군 동굴 진지였고, 가는 길은 화창한 날씨와 선선한 바람으로 인해 더없이 좋은 답사하기 좋은날 이였다. 또한 도착해서 본 바다의 투명함이 가슴까지 맑아지는 상쾌한 기분으로 첫 답사를 시작 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둘러 본 성산일출봉 일본군 동굴 진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1945년 봄부터 일본군이 미군 상륙에 대비하여 제주도를 무대로 자살도 감수한 결7호작전 이라는 방어 전투를 벌이기로 작정을 하였고 그 때문에 제주도 전체를 요새화 하기 시작하였는데, 성산일출봉은 그 중 해안특공기지로 공사가 되었다. 굴의 내부는 그렇게 깊지는 않았고 시멘트로 잘 마감된 굴이 한 개 있었으며 그 외에도 옆으로 10여개 이상의 굴이 있다고 하였는데 실제 들어가 본 굴에서는 아늑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굴의 전체적인 느낌은 넓지는 않으나 실제로 얼마 크지 않다는 자살보트와 사람이 들어서기는 딱 불필요하지 않게 적당한 넓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지금의 평화롭고 한적하며 아름다운 경관에서 그런 옛 우리 제주의 아픈 역사의 흔적을 보며 과연 이 역사는 언제쯤 치유 될 수 있을지 시간이라는 큰 흐름 앞에 상처를 넘어서 역사와 교훈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의 성산일출봉 일본군 동굴진지 답사에서는 이 곳 역사의 거의 마지막 산증인이신 ‘오시종’ 선생님이 함께 자리해주시며 그 때의 기억을 토대로 설명을 해 주셔서 더욱 그 당시의 상황을 머릿 속으로 떠올리며 그려 볼 수 있었던 좋은 기억이 된 것 같아 마음속으로나마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해 본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무라야마부대가 도착할 당시 성산포에는 해군 시설대 뿐만 아니라 육군부대들도 주둔해 있었다고 하셨다. 육군부대는 108여단 산하 부대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부대는 재소집병들로 구성된 일종의 예비군 부대이며 나이가 대부분 40대 이상 이였으며 무장 상태도 소총 이외의 무장은 없었다고 한다. 특공부대의 구성원인 요카렌등은 20세 전후의 젊은 청년들이 었는데 복장은 단추가 7개가 있는 것이 특징 이였다고 한다. 이들은 진양보트를 타고 미군 상륙을 대비한 자폭을 훈련하였는데 그 외의시간에는 잡무등을 일체 시키지 않고 휴식등을 보장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목숨을 건 임무를 띄었기에 그들을 배려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주로 휴일이나 주말등을 이용하여 선생님 가택의 10m남짓 위치한 곳의 위안소 등을 줄을 스며 이용했다고도 하였다. 그 위안소의 여성들은 20세 이하의 젊은 여성들이였으며 제주도의 주민들은 아닌것 같다고도 하셨다. 또한 이들은 예과련 생인데 비행사 훈련을 시켰으나 미군에게 제공권을 완전히 잃은 후에는 진양보트를 몰고 적함에 돌진하는 보직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은 8월 15일 전쟁이 끝난 후 폭약들은 바다에 던지고 배는 모두 소각한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이들은 시간이 흘러 1987년 제주를 방문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과연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상처를 보고 어떠한 점을 느꼇는지 궁금해졌다.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나라를 위한다는 이치아래 자행했던 많은 아픔들을 보며 시간이 지난 후 반성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을지 아니라면 그저 자신들의 젊은시절의 훈장을 되돌아보는 추억의 시간 이였을지를 말이다. 그들이 그냥 돌아가서 기록을 남기는게 아니라, 자신들의 지난 과오를 되돌아보고 반성하였다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가져본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조천의 제주 항일기념관이다. 흔히들 조천만세동산이라고 많이 알고 있으며 초·중·고를 거치며 못해도 두 세 번은 가봤던 기억이 있는 곳인데, 어릴때는 마냥 견학이라고 하면 소풍가듯이 친구들이랑 장난치느라 조형물등에 전혀 관심을 두지도 못해던 것이 아쉬웠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바쁘게 스쳐지나가긴 했지만 전시물 하나하나 눈에 넣어두려고 노력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제주도의 3·1 운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바가 없었는데 조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이번계기를 통해 알게 되어 자못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곳에 만세동산은 조천김씨들에 사비로 인해 세워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이 그러한 이유는 자신들의 가문에서 주동하고 했던 일을 후대에 알리며 가문을 높이는 결과도 하기에 그랬다고 생각이 든다. 3·1운동은 일제침략기 민족해방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제주에서는 조천 지역을 시작으로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발발은 조천출신 학생 김장환이 서울에 유학하고 있다가 16일 고향으로 돌아와 17일 인사차 김시범과 김시은을 찾아가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고 몰래 숨겨 들어온 독립선언문을 보여주며 그들은 제주지역의 시위운동을 조직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대부분 유림인 동지를 14명이었으며 대부분 조천사람에 김씨가 가장 많았다. 3월 21일을 거사일로 잡고 조천 미밋동산으로 김시범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물론 조천리 주민들과 이웃 마을 함덕·신흥·신촌 등의 서당 생도등 150여명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미밋동산을 향해 걸어갔는데, 이를 본 약 500여명의 주민들이 그의 뒤를 따라 합세 하게 되며 시작하였다. 그날 김시범을 비롯한 주동자중 9 명이 체포 되었으며, 다음 날 도 운동은 계속 되었는데 박두규, 김필원, 백응선 등의 주도로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운동을 주도했던 14명이 모두 검거되면서 운동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지만 조천의 시위 소식은 섬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배경아래 조천김씨 문중을 중심으로 미밋동산에 3·1운동 기념탑을 세웠으며 제주도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항일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삼일 운동에 관련한 것 외에도 일제하 항일운동에 대한 다른 자료들도 함께 디스플레이 되어 있다. 이곳을 보고는 일단 조천김씨 가문과는 전혀 연관이 없지만 같은 김씨 로서 일단 이들이 제주 수많은 항일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괜시리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많은 볼거리로 인해 상상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을 더 보태서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당시의 시대상 들을 디오그램 등으로 잘 표현해서 보면서 생각할 수 있었던 점에서 정말 좋았던 것 같다. 단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시간 관계상 많은 부분의 설명을 빨리 스쳐지나가며 너무 조급했던 것인데 나중에 한번 다시 들러 천천히 감상을 해보고 싶다.
세 번째로 간 곳은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라봉 입구의 모충사이다. 이 곳 모충사는 선현들의 거룩한 뜻과 애국·애족·희생정신을 후손들에게 교육하기 위해 총력안보제주도협의회가 1977년 사라봉 일대 15,000 평에 조성하였는데, 이곳에는 의병항쟁 기념탑,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 의녀반수 김만덕의 묘가 있고, 김만덕 의녀의 일대기가 간략히 그림으로 전시 되어져 있는 만덕관도 있다. 이곳에서도 많은 시간을 지체하지는 않았는데 세 가지의 기념탑을 보면서 느껴졌던 점은 인위적인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심는 상징조형물 같이 보여졌다. 그렇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언가 관리되지 않고 덩그러니 글자 몇 줄과 기념비 하나로는 크게 와 닿아지는 바가 없었고, 의병항쟁도 애국과 희생정신이 깃들였지만 실행 되지 못했던 바 기념탑을 세운다는 것에서는 강압적인 애국정신을 요구한다고 생각되었다. 의녀 김만덕도 드라마로 방영되는 등 그 분에 대한 기록은 실상 남은 것 이 몇 줄 없는 것에 반해 드라마등의 살붙이기로 인하여 허구적인 인물이 되어가는 것만 같아 역사는 바로 알아야 겠다는 생각도 다시 한 번 해볼 수 있었다. 또 무언가 부족했던 모충사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도 저녁식사를 같이하며 들을 수 있었는데 도 당국에서도, 막상 지어 놓기는 했지만, 더 무언가를 하기도 에매하고 그 건립당시의 시대배경에 애국을 강조하는 정신과 요즘의 실상이 다른바 무언가 손대기도 어려워 마치 방치 되는 것 과 같은 지경에 이른 것 같다고 하셨는데 내 생각도 그러하였다. 어렸을 적 갔던 기억과 대조해보면 무언가 달라진 것도 없고, 그저 그 들이 무언가를 하였고 하려했노라 하는 것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는 정도에 의미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답사를 통해 시간상 모두 많이 듣고 , 더 느끼지 못한 점이 아쉬웠지만 제주도민으로서 자세히 알지 못했던 역사의 한 단면을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부끄러움을 조금은 덜은 느낌 이였고, 기념물과 기념비 그리고 유적들이 생기는 배경과 그에 대한 시대상 또는 그 후의 무언가를 시사하고 남기는가에 대해서 한번 생각에 빠져보게 만드는 유익한 시간 이였던 것 같고 대학교에 와서도 이런 답사를 하게 해주신 @@@ 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이 글을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