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후기 양반家 여성들의 천주교 수용과 여성관 -
Ⅰ. 머리말
천주교(天主敎) 맨 처음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는 로만 가톨릭이었다. 교의 전파에 목적을 둔 파란 눈에 노란 털 선교사들이 성경을 들고 건너와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소리쳤고,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늘의 주인이라 해석하고 천주님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가톨릭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천주(天主)님이라는 이름을 붙여졌고 가톨릭교는 천주교라는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
17세기 淸國에 보낸 외교사절단에 의해 西學이라 명명되어 宗敎가 아닌 學文 西學은 서양의 학문이라는 뜻이다. 조선 중기에는 서학으로 불리면서 천주교에 대해 배척하는 입장이 극히 적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넘어서면서 천주교를 邪學이라 칭한 것을 보면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성향이 두드러진 것 같다.
으로서 들어온다. 18세기 중엽 홍대용, 이익과 같은 실학자들에 의해 학문으로서 탐구된다. 이후 서학 연구의 붐이 무르익을 무렵 서학을 연구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실천하려는 모험적인 학자들이 생겨났다. 주로 정치적으로 몰락한 남인세력이었다. 이후에 서학이 실천적 성향이 강해지면서 많은 수의 학자들이 이탈했다. 을사추조적발사건 이승훈과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및 권일신(權日身) 부자 등 양반과 중인 신자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의 관원이 도박장으로 의심하고 수색하였다. 예수의 화상과 천주교 서적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쳤는데, 역사에서는 이것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 한다.
, 신유박해, 신해박해를 통해 당시 천주교 신자 수의 증가는 주춤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 여성천주교신자의 수는 꾸준히 늘어나면서 조선의 천주교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해 103위 복자들이 시성되었다. 순교복자 103위 가운데 47위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입증하듯이 천주교회 발전에 여성의 역할은 지대하다.
을 하게 된다.
천주교가 실천적 성향을 띠면서, 조선정부는 천주교를 배척하기 시작 천주교를 西學이라 칭하다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사악한 학문이란 뜻으로 邪學이라 칭한다.
하였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사회적 냉대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천주교신자를 조선사회는 邪學罪人 조선에서 사학죄인이라 직접 거론하는 것은 언제쯤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를 토대로 보면, 사학죄인이 제일 처음 거론된 것은 정조대이다.
『正祖實錄』33卷, 15年 신해, 刑曹啓言: “捕得邪學罪人 鄭義爀、鄭麟爀、崔仁吉、崔仁成、孫景允、玄啓溫、許涑、金啓煥、金德愈、崔必悌、崔仁喆 等十一名, 或於曹庭曉諭感化, 或令渠家懇勸回悟.”
하지만 邪學이라 제일 처음 거론된 시기가 중종대인 것으로 보아 중종 때에도 이미 邪學罪人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라 칭하면서, 천주교 신자를 죄인 취급하였다. 천주교를 배척한 이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침해한다고 위협감을 느낀 왕실과 양반이었다. 인간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이념은 차별적인 신분질서를 바탕으로 한 조선사회를 뿌리째 뒤흔드는 불온한 사상이었다. 또 천주(天主)를 왕이나 부모보다 우월한 존재로 인정하면서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神主)를 없애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반체제 운동이었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