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나의 회고록
나의 고향은 강원도 산골입니다. 앞 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입니다. 그 산에 모양이 마치 움푹한 떡시루 같다고 하여 실레라 부릅니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초가요, 그나마도 50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입니다. 그러나 산천의 풍경으로 따지면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귀여운 전원입니다. 나 김유정은 그곳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1908년 1월 11일에 태어났습니다.
내 어린 시절 아명은 ‘멱설이’인데, 곡식이 가득 담기는 멱서리처럼 재물과 복이 가득 쌓이는 인물이 되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나는 2남6녀 중 일곱째이지만 아들로는 둘째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귀한 아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집안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나무라지 말라고 명했지만, 나는 유순하고 얌전한 편이어서 자연스럽게 두루 예쁨을 받았습니다. 외가에서는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먹성이 좋다고 해서 ‘멱색이’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었지만 우리 집안은 예외였습니다. 나는 넉넉한 환경에서 가족의 사랑을 받고 할아버지로부터 한문과 고서를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애지중지 아끼셨고,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평온했던 시절은 잠시였고, 나는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얼마 안 되어 아버지마저 여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형님과의 갈등이 심했는데, 그것이 병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나는 당시 9살에 불과했지만, 아버지가 형님에게 칼을 던진 날만큼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형님은 효자였는데 여학생 첩살림을 차리면서 갑자기 불량해졌습니다. 재산을 탕진하는 형을 아버지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분노한 어느 날 아버지는 형에게 칼을 던졌고, 만약 그것이 정통을 때렸다면 그 자리에 엎어질 것을, 다행히 몸을 비켜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아, 평생 잊혀지지 않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는 1923년, 휘문고보에 입학했는데, 안회남은 나의 단짝친구였습니다. 우리는 학교를 빼먹기 일쑤였습니다. 불우한 가정의 분위기로 인해 나는 그렇게라도 자유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우리는 남산에 올라 빈둥거리다가 점심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까먹고, 영화구경을 다녔습니다. 찰리 채플린과 바스타 키이튼의 무성영화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내가 워낙 영화를 좋아하니 형님도 그것만큼은 아낌없이 돈을 내주었습니다. 그 시절 나는 또 졸라의 나나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같은 작품을 통해 새로운 문학세계를 접했습니다. 하모니카를 좋아해서 꽤 잘 연주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감성적인 소년이었던 나는 사랑에도 첫 눈에 빠져들었습니다. 가산이 기울어 휘문고보를 휴학했던 19살에 나는 참으로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과부인 둘째 누님의 집에 기거했는데, 고단한 공장 생활에 몸이 바짝 파랬던 누이는 때때로 이유를 알 수 없이 무섭게 화를 냈습니다. 집안의 우울함을 피해, 거리를 배회하던 나는 목욕탕에서 나오는 한 여인을 목도했습니다. 그녀는 놀랍게도, 내가 지니고 다니던 사진 속, 어머니의 모습과 꼭 닮아있었습니다. 그녀를 본 순간 나는 운명임을 직감했습니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녀는 나보다 3살이나 연상이었고 기생이었지만, 그런 것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판소리공연을 관람했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명창이었고, 잊고 있던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나는 매일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한 장 편지를 쓰고 보면 몇 백 그램의 체중이 줄어들 만큼 내 살을 깎는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학생이면 공부를 하라며 만나주지 않고 내 편지를 읽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의 오라비가 나를 찾아와 이런저런 일로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녀가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나는 나의 사랑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내가 그녀에게 편지를 쓰던 그 동기는 내가 작품을 쓸 때의 그 동기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내가 만일 편지를 안 썼더라면 그 시간에 몇 편의 작품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연모를 말하느냐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는 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랑은 앎과 모름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녀에 대해 진실로 몰랐지만 내 마음의 진정에 충심을 다했을 따름입니다.
첫사랑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나는 우리 고향의 지천에 피던 동백나무(생강나무) 꽃을 떠올립니다. 꽃이 귀여워 가까이 다가섰다가도 톡 쏘는 냄새에 깜짝 놀라 물러서게 됩니다. 나는 첫사랑은 그렇게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동백꽃 향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뭇사람은 나의 첫사랑을 덧없다 비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후회함이 없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후 1931년 어느 날, 피폐해진 마음을 껴안고 실레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야학운동을 하였고 ‘금병의숙’을 지어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농민들은 대부분 토지를 빼앗겨 소작농이 되었거나 나무를 해서 그날의 끼니를 근근이 때웠습니다. 그들의 삶은 빈궁했고 피폐는 극에 달했습니다. 나는 그 곤궁함을 직접 보고 경험했기에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고될지라도 그들은 잡초처럼 건강합니다. 그리고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촌부들의 생활은 환경 때문인지 어딘지 시적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혼쭐이 나도 절망할 줄 모르고 그저 미련하게 행동하는 그들을 통해 나는 고난 앞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무기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들병이입니다. 나는 들병이들과의 즐거운 추억이 많습니다. 들병이가 동리에 들면 그날은 온 마을의 총각들이 활기를 띱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시각으로 몰려들어 인사를 청합니다. 이런 소박한 농군들을 상대로 생활하는 들병이라, 서울의 작부들과는 색채를 달리합니다. 말하자면 작부들의 애교는 임시변통으로 족하나, 들병이는 끈끈한 애정과 관심을 주어야 합니다. 그네들에게 주객 접대도 물론 힘들지만 남편 공양이 더 난사입니다. 술팔 기에 밤을 새우지만 낮에는 빨래를 하고 옷을 꿰맵니다. 들병이에게 불법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때에도 나는 오히려 일종의 애교를 느낍니다. 왜냐면 그 법식이 너무 단순하고 솔직하고 무기교라 해학미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 소설 속에서도 여러 번 담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끝없이 생겨날 것 같은 생명의 원형을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모습은 읽는 독자에게 힘을 줍니다. 나는 근심과 고통이 크다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삶은 그저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야학을 하면서 나는 또한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내 자신도 서양 문화에 탐닉한 적이 있었지만, 요즘과 같은 서양취향 일변도적인 문학사조라면 자칫 우리의 것이 잠식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조선의 소박한 군상들을 몸소 부딪치고 토착민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만큼, 그것을 나의 특색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감 있는 강원도 방언에 매력을 느껴 어법을 무시하고 들은 대로 적었습니다. 그런 점을 우매하다 하시는 분도 있지만, 나는 나의 작품이 우리가 어릴 때 오일장에서 즐겨듣던 판소리가락과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처럼 부담 없이 읽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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