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몽양 여운형에 대하여
1. 건국의 주역이자 민족 지도자로 활동
□좌우합작운동 등 거국적 독립운동 전개
“나는 완전독립이 아니면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2005년, 우리 독립운동사의 주역이자 건함인 여운형 선생이 복권되었다. 여운형 선생은 독립운동 활동과 광복 전후 민족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그 동안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독립운동가 서훈이 보류되었었다. 독립운동의 사령탑이자 사회주의 계열 최고 독립운동가인 여운형 선생의 복권의 의미는 앞으로 정부가 사회주의 계열에 포상을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작년에 이어 올해 독립운동가 포상 명단에는 상당수 사회주의 계열도 포함돼 있었다. 이는 정부가 당시 여운형 선생이 남겼던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라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몽양 선생의 초기 삶
몽양 선생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까지 조부의 슬하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5세가 되는 1900년에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봉건체제에서 깨어나 개회의 꿈에 부풀게 된다. 23세 때 몽양 선생은 노비 문서를 불지르는 등 봉건 악습 타파에 앞장서는 노력을 기울였다.
□ 상해 국외 독립운동 시절
1906년 몽양 선생은 21세의 나이로 국권회복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한일합방의 애통한 소식을 듣고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1918년 33세의 몽양 선생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그 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 민족의 독립 염원을 세계에 선포하게 하는 등 외교적 활동을 펴는데 이는 3.1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외무위원장을 맡아 대외 선전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또한 일본 도쿄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일본 기자들 앞에서 역설하는 등 외교적 독립 노선을 펼쳐나갔다.
□ 레닌과 만나다
1921년 몽양 선생은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 조선 독립을 논의했다. 레닌은 그에게 “조선이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가 낮기 때문에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힘들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답했다. 몽양 선생은 이에 동조했을 뿐 아니라 이를 신념으로 삼았다. 1924년부터 1929년까지 독립운동이 분열, 침체된 시기에 몽양 선생은 중국 혁명 운동에 참가했다. 이 사실을 통해 몽양 선생이 중국 혁명을 통해 조선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 활동으로 1929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 조선중앙일보 사장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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