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문학에 나타난 백인 & 흑인의 갈등(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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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흑인문학에 나타난 백인 & 흑인의 갈등 (인종차별)
현대 사회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사라지지 않은 인종 차별. 피부가 검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흑인들. 모든 사람은 인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위대하며 개인마다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로 똑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임에도 엄청난 차별을 받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는 있는가? 민주주의니 평화주의니 요즘 세상에 무슨 차별이냐 여기저기서 떠벌려대고들 있지만 숨은 곳곳에서도 옛날 그 차별의 틀은 변하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고 있다. 이번 수업에서 다루었던 많은 작가 중 내가 속해있는 저가 발표하였던 ‘밀드레드테일러’. 그녀가 아니었으면 인종차별에 대한 내 견해는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초등학교 때의 주관을 밀고 나가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밀드레드테일러’ 그녀는 흑인이다. 어릴 적부터 흑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배부르게 받고 자란 탓에 그녀는 스스로 자기가족과 주위 가족과 같은 일련의 이러한 가족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꾼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숲의 노래’ 로 시작해서 ‘고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 ‘우정’, ‘멤피스로 가는 길’, ‘미시시피 다리’ 로 이어졌는데, 모든 작품에서 그녀의 가족들은 가족에 대한 충성심과 자존심을 가지고 여전히 압제와 싸우고 유지해 나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에 그녀는 어떻게 자기가 알고 있는 흑인 남녀들이 꾸준히 참아내고 희망을 견지하고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위하여 싸우는지를 전달하기 위해 고심해왔다. 그리고 테일러는 소설 속에 강인하면서도 소재가 풍부한 가족의 역동적인 이야기를 담기 위해 노력한 것과 매우 현실감이 있으며 명쾌하고, 솔직하게 그리려고 한 것이 이번 우리 조 발표작이었던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 만을 보아도 느낄 수 있다.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 는 예상독자인 아동들에게 세상이 생각보다 쉽지 않으며 불공평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동시에 그러한 쉽지 않은 인종차별의 사회에서 자신들, 즉 흑인들의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자신들의 대응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밀드레드테일러와 같은 흑인 작가인 팔라폭스가 지은 흑인 아동 작품 중 하나인 ‘춤추는 노예들’에서 나타나는 현실에 소극적으로 대하는 자들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들이 백인들이 자신들에게 차별대우를 하는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역동적인 대응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더 나서서 행동하였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솔직한 모습을 숨길 수가 없어서 그 순수함 아래에 자신들이 왜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생각들을 바로바로 몸으로,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자 어른들은 눈치를 주고 이런 아이들은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눈치로 그래야 하는가 보다 하며 현실을 조금씩 알아가는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팠다. 하지만 캐시와 같은 적극적인 부딪힘과 역동적인 반격이 더욱 정의에 가깝지 않을까? 물론 위험은 감수해야겠지만 말이다. 아차, 위에서 말했던 ‘춤추는 노예들’ 를 보아도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에서 느꼈던 수많은 몰랐던 감정들이 솟구쳐올라 왔다. 물론 그 둘은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 같은 느낌과 다른 느낌이 비슷하다는 모순을 깨보려 한다. ‘춤추는 노예들’ 흑인이 노예로 물건 취급을 당하고, 사고 팔릴 때 그 과정을 겪게 되는 소년의 과정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흑인 노예들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춤을 추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비참함은 노예제의 실상을 폭로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했던 비인간적 제국주의 시절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 너무 마음이 아프다. 형식적인 노예는 없지만, 실질적인 노예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제국주의는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대신에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물론 제국주의가 사라지긴 했지만, 그 개념이 곳곳에 남아 아직 잔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계질서는 힘의 질서라고 당연시하며,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말로 모든 걸 덮어버린다. 백인이라고 인생이 성공적이고, 흑인이라고 인생이 실패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인권’ 이란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 또는 지위를 긍정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보편적이란 “모든 것에 공통되거나 들어맞는. 또는 그런 것” 을 뜻한다. 모든 것에 공통되거나 들어맞는. 모든 것이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에는 흑인 백인 인종차별 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인 권리를 짓밟고 무시하는 따위의 행위는 도무지 개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라고 말해 틀림없다.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에서 답답한 주인공은 이러한 인종차별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자신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하늘, 즉 천둥에 가 말한다. 부모님에게 말을 한 들 소용이 있나, 혼자 속병을 하기엔 너무 버거운 아직은 어린이이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천둥이 치는 하늘에 대고 천둥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말한다. 내가 이 어린이 입장이었더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어린이라는 핑계로 무례하게 백인들의 집에 찾아가 복수를 해 주었을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과묵하고 있었을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 행동주의 아이들 사이에 끼어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을까?
캐시의 부모님은 삶에 대한 애착을 두고 그들의 인권을 되찾기 위해 주도적으로 노력하며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려 한다. 주변의 모든 악한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를 포기하고 수동적으로 살기보다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계속되는 시련들이 닥쳐와도 다시금 일어서려 하는 그들의 의지에 절로 박수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의지가 나타나는 단락이 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아니지요. 어쩌면 우리는 현실을 거부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라는 대화 내용이다. 여기에서 현실을 거부한다는 말이 이들의 저항의지와 행동의식을 나타내 준다고 느꼈다. ‘춤추는 노예들’ 과 같은 내용과 인물들의 성격 같았으면 생각도 못 하는 내용이다. 소극적이고 행동의식 없는 답답한 사람들보다는 이런 면이 훨씬 자극적이고 신선하며 자신들이 마음을 다잡고 생활하는 데에도 좋을 것이다. 감명 깊었던 대사가 몇 가지 있는데 모두 정리해보겠다. “장작에 불을 피우듯이 사람한테 불을 붙였단 말이야?” 라는 대사에서는 앞뒤 상황이 눈에 보인다. 흑인의 몸에 불을 붙인 백인의 개념 없는 모습이. 자신들이 동물, 아니 물건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입이 떡 벌어진다는 듯한 단락이다. 만약에 이러한 일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사형감임이 틀림없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 몸에 불을 붙이겠는가? 또 하나의 단락은, “백인은 대단하단다 캐시, 흑인이 대단한 것처럼 백인도 대단하단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대단한 존재란다. 그래도 피부색이 무엇이든 어떤 사람도 어떤 사람보다 잘난 것은 아니란다.” 라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흑인들 자신들은 백인의 인권도 존중하고 모든 인간은 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보편적 권리를 인정하는 정의로운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단어가 있는데, 바로 “계량인종”
이라는 단어이다. ‘계량인종’ 은 자기들한테 꼭 맞는 노예를 사기 위해 사람들을 짝짓기시켜서 온갖 종류의 노예를 재 만들어낸 인종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단어를 보고 나는 1분 동안 머릿속이 멍 해졌다. 내가 만약 저들(흑인)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내가 만약에 계량인종이 되었다면 어떨까? 동물도 요즘엔 계량 종을 만들어내지 않는데 백인 자신들의 만족을 얻기 위해 흑인들을 짝짓기시키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옛날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흑인들은 항상 힘센 역할,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무서운 인상에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미지들을 백인들이 노예제 때부터 쭉 만들어왔다는 생각도 든다. 무식하게 힘만 세다. 머리에 든 것도 없는 게. 이런 말들은 백인에게는 붙지 않았다. 모든 영화와 문화, 생각, 사상들이 백인 위주인 것이 흑인 자신들은 얼마나 못마땅할까 ? 그런 상황들을 자신들이 직접 겪어가는 흑인들의 심정은.. 그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흑인들을 차별대우한 적이 없진 않다. 작년 여름방학 때 영어 회화 학원에 다닐 때 백인 선생님과 흑인 선생님 두 분이 계셨었는데 백인 선생님께서 수업하실 때 왠지 더 귀에 잘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고 흑인 선생님 수업 때는 눈 마주치기조차 좀 꺼렸었던 기억이 난다. 잘못된 행동이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이 나타났었다. 그리고 나 뿐만이 아니라 그때 수업 같이 들었던 같은 class 친구들도 모두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오늘 흑인 교수님 수업 두 시간이나 들었다면서 짜증을 낼 때도 있었고 워낙 큰 학원이라 결석을 해도 집에 연락이 안가는 터라.. 흑인 교수님 수업을 빠진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도 흑인에 대한 거리낌과 차별의식이 내재하여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를 들면 현재도 대부분 사람들은 흑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사는 것을 피하는데 그그뿐만 아니라 흑인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아이들을 보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물론 대부분 학교는 백인 흑인 혼합 학교들이 많은데, 한국사람들이나 백인들 할 것 없이 흑인이 많이 다니는 학교에 (주로 대도시의 중심에 있었으며 학생들의 대부분이 흑인인 학교들도 있다고한다)아이들을 보내기 꺼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로스앤젤레스 폭동(영어: 1992 Los Angeles riots, LA riots)이다. 이는 1992년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이어진 로스앤젤레스(L.A.)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동이었으며 미국 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왔다. 이 사건은 4명의 로스앤젤레스 경찰관이 흑인 운전사 로드니 킹을 폭행하는 모습이 TV로 공개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