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사] - 조선 초기 사대부의 초상,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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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문학사] - 조선 초기 사대부의 초상, 김시습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선 초기 사대부의 초상, 김시습에 대한 검토
1. 서론
김시습은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를 탄생시켜 소설문학의 효시를 이루었다. 따라서 국문학의새로운 장르를 낳은 『금오신화』의 작가로 본 김시습의 생애 전반과, 문학에 나타난 그의 사상적인 배경, 또 『금오신화』 이외의 저서들을 연구해봄으로써 우리 한민족의 감정과 사상 속에 흐르고 있는 의식을 부분이나 들여다 볼 수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이는 문학작품의 바른 이해를 돕는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 작가가 꼭 한가지 종교사상만을 작품 속에 표현하였다고는 더구나 볼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금오신화』를 중심으로 김시습의 문학 작품과 사상의 관계를 연결지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에 따라 김시습의 문학 작품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나아가서 우리와 정서생활과 의식구조 또한 윤택함이 더해지도록 하고자 한다.
2. 김시습의 생애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동봉(東峰), 췌세옹(贅世翁) 등이며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본관은 강릉이며 아버지는 충순위 일성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율진 장씨이며 세종 17년(서기 1435년) 서울의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시습은 그의 친척이며 집현전 학사인 최치운이 그의 재주에 경탄하여 지어주었는데, 태어나서 8개월만에 글을 알았고 2살에 시문을 깨쳤으며 다섯 살에 대학, 중용을 터득하였다.
그는 13세에 이르기까지 대사성 김 반의 문하에서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춘추를 배우고 겸사성 윤 상에게서 역례제사와 제자백가의 서를 배움으로 보지 않은 책이 드물었다. 그는 신동으로서 5세에 이미 그의 시명은 널리 알려졌고,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이 승정원에 분부하여 시습을 부르시고 그의 실력을 시험하도록 하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오세(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시습이 13세 되던 해에 어머니 장씨가 돌아가며 설상가상으로 부친까지 병상에 눕게 되어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강릉에 내려갔으나 그 곳에서 일시적으로 사랑을 주던 외조모마저 돌아갔으며 아버지는 계모를 취하였고 가문의 유지를 위해 혼인을 성사했으나 시습의 처는 혼인 얼마 후 병사하여 원만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로 하여금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였고 18세에 송광사에서 불교에 입문하였다. 그 후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전준걸, , 새국어교육 Vol 35 No.1, 1982
21세 때인 1455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는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고 전한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사육신의 시신을 주섬주섬 바랑에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관서 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것이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으로 남은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1463년, 29세 대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에 참가하여 교정을 맡아 열흘간 내불당에 거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이들이 영의정과 판서에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에 칩거하였다. 이 때 매월당이라는 호를 사용하였으며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와 수많은 시편들을 남겼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하게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들은 곳이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였다. 이곳에서 1493년,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