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누구인가?
Ⅲ.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업적
1. 기독교 정책
2. 수도이전과 체제개혁
Ⅳ. 맺음말
Ⅴ. 참고문헌
Ⅰ. 머리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대제, 즉 콘스탄티누스 1세는 첫 번째 그리스도인 로마 군주였다. 그는 밀라노 칙령 313년 2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칙령(勅令)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와 빼앗은 교회 재산의 반환 등을 밝혔다.
을 통해 과거 수많은 황제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온 기독교를 승인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창건하였으며 많은 행정적 개혁을 이루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치세는 수많은 변혁의 시대였다. 그의 시대를 기점으로 종교뿐 아닌 수많은 정치적, 제도적 변화가 있었으나 우리는 흔히 그의 기독교적 업적에만 집중하기 쉽다. 실제로 그의 관한 연구는 주로 종교적 관점에만 치우쳐있는 경향이 없지 않으며, 그의 시대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이었기에 다른 정치·제도적 개혁은 비교적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관하여 알아보는 과정에서는 종교적 입장에만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이외에 그의 통치자적 업적에도 무게를 두어가며 간단히 알아보고자 한다.
본문에서 다루려고 하는 콘스탄티누스대제에 관하여서는 수많은 논쟁들이 존재한다. 그의 기독교 공인이 알려진 대로 그의 신실한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는지, 정치적 목적 아래 이용되어진 것인지, 그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논쟁에 관한 것들은 논외로 두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에 초점을 두고 종교적, 정치적으로 나누어 그의 행보를 알아보고자 한다. 다음의 본문에서는 먼저 콘스탄티누스라는 인물에 관하여 간단히 알아보고, 그의 종교정책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 수도이전과 체제개혁의 순으로 그의 업적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누구인가?
콘스탄티누스는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Flavius Valerius Constantius(250~306), 로마의 장군이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구상한 사두정치체제의 일원이 되어 293~305년에 부제(caesar)로 있었고 305년부터 306년까지 서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의 담당지역은 갈리아였으며, 브리타니아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난 아우렐리우스 카라우시우스와 대항, 변방의 방어선을 재정비, 프랑크족과 작센족의 약탈행위에 대한 조치를 취했으며, 갈리아에서 알레마니족을 물리치고 개선하기도 했다.
와 그의 아내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집안은 3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군사 지배 계급에 속해 있었다. 293년 그의 아버지는 부제(caesar)의 지위에 올라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라는 칭호를 얻었고, 서로마 황제인 막시미아누스를 보좌했다. 289년에 그는 헬레나와 이혼하고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과 결혼하였으며, 당시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니코메디아로 보내져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자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아버지의 사후 서로마로 돌아와 아버지를 따르던 브라타니아의 군대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 추대되었다. 311년 4분체제의 수장이었던 갈레리우스 Valerius Maximianus Galerius,(242 ?~311).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로마제국의 동부를 다스리는 카이사르에 임명되었으며, 도나우강변에 웅거하던 야만족을 격퇴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298년 페르시아와 우세한 전투를 함으로써 유리한 강화(講和)를 맺을 수 있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헌책(獻策)하여 그리스도교의 대박해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서 물러난 뒤 서부의 통치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즈와 함께 정식 황제가 되어 동부를 통치하였다. 309년 병을 얻은 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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