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사생활의 역사 1 로마 제국부터 o 년까지
(로마 제국부터 천 년까지)
사생활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 사생활의 양상이 드러난다고 여겨지는 장소를 연구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연구 대상을 설정한 것일 뿐 이론을 제시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대의 폐허가 시사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사생활에 대한 최소한의 이론적 근거가 필요하다. 우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고전 그리스 시대의 도시에서는 개인 주택의 규모와 장식이 극
히 소박했다. 모든 웅장함과 사치는 공공 분야 , 즉 도시만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 되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도시 자체가 개인과 공동체의 융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합치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여기서 개인은 자신이 정치적 공동체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생활을 누릴 자격을 사진 시민으로서의 신분까지도 그러했다. 헬레니즘 기대에 들어서면 고전 시대의 도시가 위기에 처하면서 변화가 초래되는데, 한마디로 공적인 영역이 줄어드는 대신 사적인 영역이 괄목할 만큼 확대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적의 상대적 중요성이 문제가 아니라, 두 영역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어떻게 서로를 규정하는지를 분간해내야 한다. 사생활의 역사는 사적인 영역이 생겨나 공적인 속박에 맞서 스스로를 인정받아가는 어렵고도 기나긴 역사가 아니다. 사생활의 성격은 각 사회마다 다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사회 관계의 산물이며 또한 해당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나를 정의하는 잣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로는 대담하게 사생활을 재정의 할 필요가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집에나 집 안의 각종 공간은 그 용도에 따라 불투명성의 정도를 달리하는 법이지만, 로마 시대의 집은 그 정도가 다양성을 넘어 이질성에 근접할 정도이다. 그러나 로마 시대의 집이 본질적으로 사적 또는 공적인 영역들이 겹쳐져 있는 곳이라고 해서 그 일관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집 안 공간 중 외부를 위해 마련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은 모순되지도 않으며, 공과 사가 비합리적으로 연결되
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이러한 건축에서 우리는 당시의 지배 계층이 사생활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었나를 파악할 수 있다. 사생활에 대한 그들의 정의는 매우 확대된 것이었다. 이 본질적 현상은 분명히 사회적인 차원의 행위들이 집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이것은 달리 어쩔 수가 없어서도 아니고, 개인이 공적인 영역을 침탈해서도 아니다.
제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북아프리카 명사들의 집은 사생활의 여러 단계와 여러 양상을 포함했다. 물론 거기에는 각 개인의 은신 장소도 있고 좁은 의미, 즉 근대적 의미의 가족에게 국한된 장소도 있었다. 이 가족구조는 놀라운 확대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결혼해 들어오는 외부의 여인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관습의 변화에 따라 약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강력한 가장의 권한에 따라 설정된 이론적 경계 내부에 여러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됨으로써 가족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경우에 따라서는 친척도 포함되었으며 하인과 노예도 모두 포함되었다. 이 현상은 부자 관계의 틀에 맞추어 설정되어 있는 보호자와 피보호민들의 관계나 종교적인 심성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 도무스의 구성 요소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은 도로와 주택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었는가의 문제이다. 대저택에는 보통 여러 개의 입구가 있었지만 그 중에는 항상 정문이란 것이 존재했고, 바로 이곳이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담당했다. 이 장소는 수많은 상징성을 지니는 것이다. 문은 도덕성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재산을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했던 것이다.
이 전략적 장소는 건축업자들이 특히 공을 들이는 곳이었다. 기둥을 둘 세우고 지붕을 얹은 포오치를 만들어 이 곳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다. 보통 하나가 아니라 분명하게 서열이 매겨진 두세 개의 문이 있다. 문짝이 두 개인 커다란 대문이 있고, 그 옆에 좀더 작은 문이 하나 또는 둘이 있다. 대문은 마차용이고 작은 문은 보행자용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문지반이 사용된 흔적이나 안쪽 방들의 구조로 보아 결코 마차가 지나다녔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입구를 이렇게 여러 칸으로 나눈 것은 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일상적으로는 작은 문만 사용하여 그 족은 폭으로 집 안과 집 밖의 구분을 강조하다가, 특별한 순간에 대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구는 시간에 따라 집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는 복잡한 성격을 지닌 곳이다. 집을 지을 때 자기 야심의 표현무대인 이 장소에 주인이 특별히 공을 들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볼 기회가 없을테니 문만 봐도 얼마나 부잣집인가를 알 수 있게 해주고자 한 것이다. 다음으로 페리스타일은 저택의 심장부이다. 하늘이 열린 중앙 마당은 주변의 방들에 공기와 빛을 공급한다. 마당 주위를 둘러싼 열주는 상당한 규모로 줄이기보다는 사용 가능한 면적을 최대한 이 부분에 투여하고자 하였다. 가장 야심 찬 저택들의 페리스타일은 그 규모가 대단하다. 이 장소는 중대한 관심 대상이다. 오늘날 일반적인 주장은 페리스타일이야말로 주택 내부의 공적 부분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넓게 자리잡고 세워졌으므로 손님들을 맞아들이는데 적절하다는 주장이다. 페리스타일은 거의 항상 현관과 바로 연결될 뿐 아니라, 대부분의 손님접대용 공간들이 페리스타일 주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주가 늘어선 페리스타일은 손님접대용 방들을 보충하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프리카의 주택에도 안쪽의 공간들을 침해하지 않게끔 마치 아트리움 도로 가까이에 위치하여 사람들을 맞이하는 방들이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이탈리아의 주택과 견주어 볼 때,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명백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폼페이의 페리스타일도 가족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아프리카의 페리스타일도 비록 아트리움은 없었지만 온갖 방문객을 다 받아들인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마당으로 나 있는 방들을 보면 이런 인상이 더욱 짙어진다. 응접실도 있지만 전혀 성격이 다른 방들도 그 옆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아프리카 페리스타일이 공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곳이 침실이다. 침실은 가장 사적인 공간이다. 침실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침대가 놓였던 자리는 방의 다른 부분보다 약간 높게 단이 놓여 있거나 아니면 바닥을 꾸민 두 종류의 장식타일 가운데 보다 단순한 무늬가 사용된 까닭에 곧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실과 응접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음은 쉽게 밝혀낼 수 있으며, 이는 동시에 상당히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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