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강산무진은 덧없는가 김훈 강산무진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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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죽음 앞에 강산무진은 덧없는가 김훈 강산무진 서평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서평]
죽음 앞에 강산무진은 덧없는가?
-성장소설로써의 「강산무진」,김훈
김훈의 소설을 어른의 소설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는 소설 속 인물들의 나이가 사오십 대의 중년층인 이유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 인물들이 가지는 허무주의적 성향에 근거한다. 한 문학평론가의 표현을 빌자면 김훈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견자의 허무’를 이야기하는데, 그 견자의 허무란 ‘성숙한 어른’이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주장이다. 상실, 혹은 죽음의 과정을 그저 서류를 결제하듯이 정리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나는 인물들의 무덤덤한 모습이 허무주의적 성향 속에서 나올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김훈 소설 속의 허무는 완성된 허무가 아니다. 그것은 김훈의 소설 속 주인공이 허무를 완전히 실행하지 못한 인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강산무진」의 주인공이 ‘강산무진도’에서 읽은 허무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태어나지도 않은 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일종의 이상향적인 진리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끝내 모든 것을 포용하지 못하고 떠난다. 허무는 남은 시간 동안에 주인공이 도달해야할 과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강산무진」은 허무에 도달한 완성된 어른의 소설이 아닌, 어른이 되고픈 소설 즉, 일종의 성장소설에 가깝다.
사전적으로 성장소설은 “주인공이 그 시대의 문화적·인간적 환경 속에서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에 이르는 사이에 자기를 발견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이를테면 자신을 내면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한 소설”을 뜻한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성장소설의 주인공은 한 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로써 자아의 발견과 정신적 성장을 통해 공동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여야 한다. 57세의 의류회사 중역 김창수는 당대의 중년 남성을 대표한다. 또한 김창수는 죽음을 앞둔 인간 그 자체를 대표한다. 물론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고저여하에 따른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죽음 앞에 놓인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둔다면 김창수가 가진 개별성은 논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 지닌 절대성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모두 같은 공포를 갖는다. 다만 각자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작가는「강산무진」에서 중년 남성이 죽음을 선고받고 자신의 주변 즉, 개인사를 정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도달해야할 진리를 말한다. 인간이 도달해야할 곳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강산무진도’의 진리이며 그것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포용이다. 부정을 부정하지 않는 포용의 단계에 이르면 외부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부정도 결국 자신의 안에서 충돌하지 않고 조화할 수 있는 경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작가가 김창수라는 인물을 통해 전달하려는 공동체적인 메시지이다.
“화가가 이 세상의 강산을 그린 것인지, 제 어미의 태 속에서 잠들 때 그 태어나지 않은 꿈속의 강산을 그린 것인지, 먹을 찍어서 그림을 그린 것인지 종이 위에 숨결을 뿜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거기가,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인 것처럼 보였다.” (본문 133p)
위에 인용한 단락은 죽음을 앞둔 김창수가 의사의 권유로 산책을 하게 되고, 우연히 보게 된 ‘강산무진도’를 통해 자신이 도달해야할 곳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김창수가 암을 선고받고 주변을 정리하는 장면을 성장을 위한 통과제의의 단계로 본다면, 인용한 장면은 성장소설의 깨달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나아갈 방향 즉,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여 소설의 주제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의 표면화는 독자가 스스로 사유할 기회를 박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힘을 갖는 이유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난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아득하고 가없는 산과 강들이 눈 아래로 흘러갔다. 비행기가 동해에 가까워지자 산과 강이 끝나는 저쪽에서 안개처럼 뿌연 바다가 보였다. 날이 흐려서 바다는 잿빛이었고,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빛의 다발이 눈 덮인 먼 산들 위에 얼룩무늬를 드리우고 있었다. 는 살아있는 내 눈 아래 펼쳐져 있었고 그 화폭 위쪽, 산들이 잔영으로 스러지고 바다가 시작되는 언저리에서 새빨간 럭키스트라이크 담뱃갑이 바람에 날리는 환영이 보였다.” (본문 352p)
위의 장면에서 김창수는 나아갈 방향을 알고도 끝내 포용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떠난다. 그것은 부인의 기도를 거부하고, 오히려 살충제 냄새를 떠올리는 그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의 포용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또 하나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 새빨간 럭키스트라이크 담뱃갑. 그것은 어린 시절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럭키스트라이크 담뱃갑에 충격과 혼란을 경험한 그의 어린 시절은 지금의 그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지향점이다. 포용은 결국 과거의 회귀를 통해서 가능하며 인간의 성장은 한없는 세상을 돌고 도는 무한한 반복인 것이다.
김창수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투병의 생을 살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스스로 찾은 길을 통해 세상을 포용하는 성장을 할 것이다. 종착을 앞둔 생의 깨달음은 덧없는가. 아니다. 암이 내포하는 상징성에 주목할 때, 그의 성장은 결코 헛되지 않다. 암이 “몸 안에서 스스로 태어나서 자라고 번식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사라지는 것도 스스로 가능하다는 전제를 포함하다. 따라서 김창수가 암을 이겨내는 포용 즉, 강산무진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그의 안에서 모든 것이 조화로울 때, 우리는 그를 통해 간접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강산무진」이 궁극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이고, 내가「강산무진」을 성장소설로 보는 까닭이다. 나는 김창수를 응원한다. 나의 또 다른 이름으로써 김창수가 부디 성장하기를 나는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