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선택하라. 자동차를 선택하라.
영혼을 마비시키는 게임쇼를 보는 인생을 선택하라.
우리를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라.
선택하라. 선택하라
그러나 나는 인생을 선택하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
1.1994년 4월 커트 코베인 자살하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담아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예전처럼 맞설 대상이 명확하다면 차라리 살기가 편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응전할 대상이 사라져버렸다. 사실 사라졌다기보다 교묘하게 자신의 감추고 더욱 대담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표류하고 있다. 우리는 방향감각을 잃고 그저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의 모습들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징후들로 가득했었다. 오물이 아닌 인간의 썩은 체취와 같은 미래지향적인 악취로 가득했던 동네 전화부스는 그 종말의 예언을 심오하게도 했었다. 하나씩 늘어가는 유리의 금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요구하는 보이지 않는 인종들의 영역다툼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상기시켜주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징후일 뿐이었다. 그것들은 영원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될 불안감을 덮어보려 험악하게 굴었지만 다만 좀 더 빨리 철거 될 빌미를 제공하였을 뿐이었다.
Never Mind 로 락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버린(스스로의 의지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커트’는 내 생각엔 미남일 뿐 아니라 순수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낭만적이기도 했다. 그들의 언플러그드 앨범을 들어본 바에 따르면 말이다. 하여간 그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고 빨리 소멸해 갔다. 바로 티셔츠 속으로 말이다. 마지막 락의 낭만적 외침이자 진정한 카운터컬처적인 목소리는 모순적이게도 거대 MTV적 총아로서 군림하다 그 스스로 목을 내리쳐 버렸다. 이제 반항은, 최소한 문화적 반항의 정체성은 그 이미지일 뿐이다. 그렇게 90년대는 모순적인 열기 속에서 사람들을 조용하게 세뇌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이전 세대의 낭만적인 유물을 그리워하며 스스로는 철저하고 냉정해지기를 요구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춘기는 그렇게 급변하는 일상의 무대에서 성장의 지침을 잃고 성장해 버렸다. 진보라는 담론 속에 우리의 에너지는 그 사회 진화의 연료로 모두 강탈돼 버렸다.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지만 ‘존 레넌’도 ‘짐 모리슨’도 ‘제니스 조플린’도 ‘시드 비셔스’도 이미 저세상 사람들이었다. ‘밥 딜런’이 무대 위에 설수 있기를 더 이상 바랄 수는 없었다. 그때 지구 반대편에서 ‘이기 팝’의 장단에 맞춰 신나게 한 무리가 달려왔다. ‘렌트보이’. 그를 만난 순간 나는 내 인생의 친구목록을 추가했다. 그는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
“아무하고도 같이 있지 않아.... 나와 나 자신뿐이야.”
누구를 위해 세상은 이리도 시끌벅적한 것일까? 골목길을 돌아 가로등도 외면한 길로 접어들자 이제 담배연기와 함께 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차라리 외로운 편이 마음 편하다. 세상 어디를 가도 딜레마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나와 나 사이의 고립에서 오는 딜레마를 아무도 모르게 택한다.
90년대는 이제 오래전의 과거가 되었다. 그때의 책들은 낡고 그때의 음악들은 허무하게 부유하고 그리고 모두들 홀로 남았다. 슬프지 않은가 이메일로 사랑을 확인하는 건......하지만 아직 가슴속에 작은 불씨를 살려둔 친구들을 위해 적어도 꿈이란 걸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해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2.‘트레인스포팅’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들
배경: 1980년대의 스코틀랜드의 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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