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의 이방인을 읽고 - 인간의 이중성
난 가끔씩 세상을 향해 분노할 때가 많았다. 왜 나만 이렇게 당해야 하나, 하는 억울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럴 때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끝까지 차 오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잘 죽을 수 있을까 하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가 된 때도 있었다. 그런 생각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릴 수 없었다. 함께 떠들며 이야기를 해도 늘 혼자인 듯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난 세상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 또한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으로 나를 규정짓곤 했다. 난 내가 세상과 타협 할 수 없는 부조리를 지닌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뫼루소가 좋았다. 그를 만나고부터 내 삶에 새로운 변화가 왔다. 책장이 하늘거리도록 읽고 또 읽으며 그의 생각들을 삼켰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과 상관이 없는 사람을 죽이고도 죄의식은 커녕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도 사람들이 가르쳐 주었을 뿐이라고 천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뫼루소. 검사와 판사 모든 배심원들은 그런 뫼루소를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고 분노하며 사형을 언도하지만 내가 본 뫼루소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다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조리(不條里)라는 것을 나누어 받은 사람일뿐이다.
자신의 인격을 분석하고 그 구성요소를 분간해낼 능력이 없다고 벌할 수가 있을까. 자신이 지닌 원시적인 심리상태를 증언하고 또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통념에 적응할 능력이 없음을 드러냈다고 그 사회에서 추방시켜야 할까.
원초적인 조건으로서의 부조리란 바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분리를 나타낸다. 통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열망, 인간 정신과 주어진 자연이라는 극복할 길 없는 이원성 사이의 분리, 그리고 영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충동과 그의 존재가 가진 한정된 성격 사이의 분리, 인간의 본질인 근심과 그의 노력이 보여주는 허영 사이의 분리가 그것이다. 죽음, 진실들이나 존재들을 하나의 원칙으로 단순화 할 수 없다는 복수성, 현실이 담고 있는 지각 할 수 없는 어둠, 우연, 바로 그건 것들이 부조리의 제극점인 것이다.(장 폴 사르트르-이방인 해설 참고)
사람은 누구나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것을 보고 판단하여 그 사람의 이렇다, 하고 단정 지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정말로 이해 안 되는, 도저히 사람이라고 보여지지 않는 이들도 우리 주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뫼루소 또한 그런 사람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눈물은 커녕 아무런 감정 조차 느끼지 못한다. 이웃 사람이 죽어도 슬픈 법인데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도 냉소적이다. 더없이 건조하다. 하는 첫 문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충격적이리만치 차갑다. 얼음처럼 냉랭하다. 감정의 찌꺼기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신 지도 모른다.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없다.
장례를 치르고 바다로 나가 여자를 만난다. 그것을 보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분노하게 된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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