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그의 사상에 대하여
머리말
모택동은 대장정의 신화를 창조한 주역이자 60~70년대 서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중국적 마르크스주의, 즉 모택동주의의 열풍을 자극한 주인공이다. 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후진적인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쿠바와 베트남의 혁명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의 다른 길을 보여주었다.
위대한 체 게바라가 거점이론이 농촌주민들과의 결합력이 약했고 스스로 고립된 투쟁을 전개했던 데 반해 모택동의 홍군은 농민 속에서 ‘물과 물고기의 관계’를 창조했다.
호지명의 베트남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지침이 농민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함께 농사짓고 그들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모택동이 중국혁명에서 구사한 게릴라전술의 탁월함을 알 수 있다.
제 3세계의 혁명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 결합, 마르크스주의와 농민혁명의 결합을 성공시킨 모택동만큼 매력적인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생애동안 그의 사상과 혁명 전략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Ⅰ. 신문화 운동과 모택동 사상
1839년의 아편전쟁과 1860년의 태평천국의 난으로 가속화되기 시작한 전통질서의 붕괴는 청조의 몰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전통문화와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재평가를 강요하는 위기상황을 초래했다. 강유위와 양계초를 중심으로 추진된 무술유신운동의 실패와 손문의 신해혁명의 좌절은 전통문화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운동을 초래하였다. 즉, 진독수 등은 신 중국을 거설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가치와 제도를 타파하고 중국 인민의 정신적인 각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청년들은 진보적이고 실용적인 새로운 가치를습득하여 신 중국 건설의 전위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신문화 운동은 당시 장사사범의 학생이던 모택동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17년 모택동은 진독수가 주간하는 (신 청년)이라는 잡지에 "체육문화의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문야에 흐르는 유교의 가치관을 배격하였다.
1918년 장사에서 신민학회를 조직하고 청년들의 육체적인 단련, 애국심,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모택동은 이미 전통문화의 핵심적인 군신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의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서구제국의 정책에 항거하여 최초로 대규모의 대중운동이 발생하자 모택동은 인민대중의 대동단결에 의하여 신 중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민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인민대중의역사적 사명과 잠재력을 강조한 이 논문은 모택동의 인민주의적인 성향을 예고한것이라고 하겠다. 중국의 전통가치를 타파하고 청년들의 이데올로기적인 각성을 통하여 신 중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이 당시의 모태동의 사상은 1949년 이후 문화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사상개조운동으로 발전하였지만, 1919년 당시의 모택동사상은막시즘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에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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