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 토저의 이것이 예배이다를 읽고
인간의 존재 목적은?
인간의 존재 목적도, 교회의 존재 목적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예배는 ‘내 평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다. 우리 인간이 피조물인 것을, 이 세상 속에서 왜 여기 이 자리에 있는지를, 왜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항은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이다.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만물을 지으셨다고 가르친다. 만물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소중한 존재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닮도록 지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분의 생기가 코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인간은 생령이 되었다.
다른 피조물들은 모두 그들의 존재 목적에 충실하다. 꽃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태양은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으며, 새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며, 쏟아지는 햇빛으로 가득한 하늘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한다. 또 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간은 침묵한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똑같이 육신의 몸을 입기로 작정하셨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자신을 스스로 희생제물로, 대속물로 던지셨다. 이제 인간은 다시 그분께 구속되었다. 죽음을 꾸짖으신 그분으로 인하여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여전히 무덤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손가락을 위로 향하고는 갈 곳 모르고 걸어간다. 여전히 다른 이들을 탓하며, 판단하며, 평가하며,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어둠속으로 걸어간다. 영원한 삶은, 천국은 이러한 자들의 몫이 아니다. 그곳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예배자의 공간, ‘하나님께 영광’이라 소리치는 자들의 몫이다.
참된 예배는?
누구나 대상은 다를지라도 그 대상에 대한 깊은 경건의 감정이 충만하다면 예배를 경험할 수는 있다. 하나님 없이도 종교적 체험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로지 당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 하셨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닐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가룟 유다가 그랬고 가인이 그랬다. 우리의 예배 역시 주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될 수도 있다. 바로 가인의 예배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정죄하고 거부하셨다. 그 이유는 속죄가 빠진 예배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우리의 예배에는 속죄의 피가 있는가?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는 아닌지 짚고 또 짚어보아야 한다.
죄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영혼에 죄의 바이러스가 침투하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여 죄가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죄는 분명 부자유스러운 것이다. 이 ‘죄’는 누구에게나 있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죄를 통제할 능력 또한 우리에게는 있다. 또 주께서 베푸신 회개의 자리도 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왜냐하면 죄 때문에 세상에 슬픔과 고통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죄만큼 심각한 문제는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태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 짓을 버젓이 자행한다. 심리학, 인본주의, 또 온갖 종류의 종교의 이름으로 그런 짓을 한다. 자기들의 입맛대로 골라 그것만을 믿음으로, 자기 자신이 심판자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뜻대로 판단하고 옳은 이를 정죄한다. 이들이 바로 이단이다. 그들은 이 같은 행위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른 채 이리저리 떠돌며 퍼덕거린다. 무서운 일이다. 교회가 십자가의 속죄의 보혈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 교회를 빠져나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속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배의 성령!
예배의 성령님은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성령님께서는 진리가 없는 곳에서는 일하지 않으신다.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다. 엄숙한 오르간 소리와 아름다운 찬송가가 울려 퍼진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안 계신다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복된 시대, 복된 곳에서 살고 있는가? 지금도 어느 곳, 누군가는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말씀이 넘쳐나는 시대, 구약 신약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처럼 진리가 날마다 선포되고 있는 복된 시대인데도 왜 우리는 성령을 거부하는 죄에 빠져 있는가?
진정한 예배란?
예배는 마음의 상태다. 내적 태도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안에서의 지속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어떤가? 예배는 너무 형식에 매여 있고, 제도가 예배보다 앞서 예배를 주관한다. 예배는 틀이 아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지는 예배.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정해진 시간 안에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예배. 기도조차 지휘자의 구령에 맞춰 모두가 일순간 드려졌다 일순간 끝나는 예배. 마치 감독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예배. 시간이 되면 썰물처럼 모두 다 빠져나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런 예배에, 하나님에 대한 참 경건과 교제가 있는지 참으로 당황스럽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감탄을 겸손히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교만한 마귀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듯이 교만한 사람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진정한 예배에는 감탄에 찬 경외감과 경이감이 흐른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을 다 이해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배가 아니다. 그런 존재는 감탄과 외경심과 찬양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영원 전부터 신비로 둘러싸인 분만이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판기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산타클로스다. 선물을 기대하다가 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눈을 흘기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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