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 강 레포트
일몰 직전, 거대한 강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다. 사흘 전 남자는 하마터면 그 강에 수장될 뻔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지금 살아남아 2인분의 양고기와 최고급 캐비지를 맥주와 곁들이며 강을 완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살아남은 오늘은 ‘새로이 시작되는’ 날이다.
남자는 죽음의 경험을 통해 삶의 유한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매일 반복되었던 지겨운 일상과 전전긍긍했던 업무들에 치여 살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자조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따지도 보면 너무도 짧은 生안에서 그는 쳇바퀴 속의 다람쥐처럼 앞만 보고 질주해온 것이다. 다시 태어난 그는 비로소 ‘발밑에 나 있는 야생 잔디 한 잎 한 잎’과 ‘연분홍 핏빛에 싸인 신선한 양고기’를 음미하며 ‘순간’을 즐기고 있다. 살아있다라는 것을 온 정신과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일몰 후, 자신을 위한 축배에 여념이 없는 남자 앞에 웬 젊은 남녀가 나타난다. 젊은 남녀는 소란스레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데, 그들은 꼭 자신과 아내의 옛 모습과 닮아있다. 그럼에도 그런 그들을 보는 남자의 시선은 혼란이 아닌 거의 관조에 가까운 시선이다. 파멸(죽음)을 앞둔 남녀의 싸움이 극에 달해도 남자는 여유롭게 고기를 맛보며 객관적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싸움이란 모름지기 ‘내일’이 있기에 성립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유한의 존재인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기투된 동시에 죽음이라는 운명과 삶을 함께하는 존재 아니던가-‘현재’의 중요성을 몸소 깨달은 남자는 그들의 격렬한 언쟁에 일말의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시간을 즐긴다. 그리고 잠시 사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혹시 사고의 원인이 젊은 부부처럼 아내와 자신의 언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잠시 의구심을 가져본다. ‘파국에 이를 만큼 거친 말을 주고받다가, 앞에 있는 커브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런 기억마저 다 함께 잃어버리고 만 것일까’ 그러나 단지 추측일 뿐, 이내 남자는 생각한다. 잃어버렸다면, ‘만약 그렇다면 나는 한층 더 운이 좋은 남자인 셈이다.’ 그에게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과거의 유실을 뜻한다. 과거란 즉 잊고 싶은 모든 것이다. 그는 그를 짐지웠던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다. 그조차도 낯선 ‘만족감’과 ‘여유’가 이에 연유할 것이다.
짙어가는 밤, 또 한 명의 손님이 나타난다. 손님은 바로 마르께스의 익사체처럼 거구의 사내다. 덩치 큰 사내는 범인은 감당 못할 양의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하는데, 남자는 그런 남자의 모습에 주눅 들기보다 외려 ‘친구라 여기고’ 싶어질 정도의 살아있음을 사내에게서 낀다. 살아있음이란 감각에 있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 중에 음식을 씹어 넘겨 나를 채우는 행위만큼 ‘살아 있다는 느낌이 절실해’지는 행위가 또 있으랴. 소설이 그토록 미각적인 요소를 자극하는데에는 바로 살아있는 생생한 감각을 전하려는 작가의 의중이 담겨있는 까닭일 것이다. 어린 아이 둘이 거구의 사내에게 달려와 틀림없이 그들 가족 중의 하나였을 노인의 죽음을 다급하게 알린다. 그러나 그는 조금의 동요없이 음식을 맛보며 기다리라고 말한다. 사내에게 아이들은 그가 무서워 차마 앞에서 말하지 못하고 저만치서 손을 모아 매정한 인간이라 욕하지만 사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요하지 않는 것은 그를 비롯한 야외 식당의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하룻밤 사이, 화자인 나(자신의 죽음)도, 젊은 부부(결별)도, 거구의 사내(가족의 죽음) 모두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보다 ‘살아있음’이 실재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네 인물이 침묵한 채 강을 응시하는 마지막이 웅장한 울림으로 남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초상화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이 강을 뒤척인다고 표현한 것이 있다. 그렇다, 강은 살아 있다. 강은 인류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강은 무한의 공간이며 순환의 공간이다. ‘부패한 물은 바다로 흘러가, 밀려오는 파도에 부딪쳐, 해류를 타고 먼 먼 바다로 옮겨져, 수평선 먼 저편에서 깨끗하게 정화되어, 다시 소생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죽음과 소생의 공간이기도 하다. 유구한 강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일 것이다. 쳇바퀴같은 일상과 사소한 일들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더없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상념들이 살아 흐르는 거대한 강 앞에서 보잘것없어지는 까닭은 이 상념 또한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깨달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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