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 감상문
[1996년 3월, 미국의 어느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에서 일리치(이반 일리치)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랍비의 전통이나 기독교의 수도원 전통에서는, 또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 사람들이나 키케로는 이미 우정에 관하여 알고 있습니다. 즉,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그대의 눈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 선물이 되게 하는 것은 당신인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지 못하면 나는 온전한 인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가 중요하다. 바로 이런 의식을 우리가 가질 때 나와 타자 사이에 비로소 건강하고 올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정말 감동적인 글귀였다. 과연 인간을 인간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반 일리치는 ‘우정’이라고 말한다. ‘우정’이란 의식을 사회 구성원 한명 한명에게 인식될 수 있을 때 나와 타자사이에 건강하고 올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그 관계들이 바로 공동체이다. 이 때 말하는 공동체는 언어, 혈연, 지역 등의 개념으로 이루어진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즉, 집단 중심이 아니라 ‘관계’중심의 공동체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서로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길, 공동체(community)의 어원도 서로(com) 선물(munus)에서 왔다고 한다. ‘우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중심의 사회는 오늘 날의 무한경쟁사회에서 ‘피가 말라가고 있는’ 젊은 청춘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해주고 있는 듯하다. 비록 정답은 아닐지라도.
이 이야기는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강수돌.2008.생각의 나무)’에서 발췌한 글이다. 이 책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무한경쟁의 시스템에 빠져 목적이 아닌 수단이 돼버렸다고 비판한다. 가속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끝은 어디이며, 인간은 어디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가?
이 책에 따르면 한국은 2004년 이래 근로기준법에 의거 주5일(제40시간제)가 실시되고 있음에도, 실제 노동시간은 별로 줄어들지 않고 OECD 국가 중 가장 길다고 한다. 연간 실 노동시간은 2,380시간으로, 주요 22개국의 평균 1,701시간보다 약 40퍼센트나 더 많이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단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만약 당신이 일을 안 해도 좋을 정도로 충분한 돈을 얻게 되어도 일을 할 것인가”란 물음에 “일을 그만두고 여가를 즐기겠다”라고 답한 이가 미국 59%, 독일 43%, 일본 40%, 한국 25%라고 나왔다는 조사다. 이를 비롯해 한국에서의 조사에는 “사생활이 침해되더라도 일은 열심히 해야한다”, “가정보다 일터가 편안할 때가 있다”, “실직이 이혼보다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등의 질문에도 절반가까이 그렇다는 응답을 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의 성장과정상의 특성에서도 “어린 시절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가”란 질문에 한국(53%), 일본(35%), 미국(32%)의 순으로 그렇다고 응답했고, 그 밖에 “우수한 성적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 노력했는가”, “가정에서 자신의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없었다”등의 물음에도 조사자의 과반 수가 넘는 한국인이 그렇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물론 이 조사를 어떤 기관에서 어떠한 목적으로 어떤 뉘앙스로 물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100% 신뢰할 수 있는 자료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성장을 목표로 하고서 지금까지 달려온 한국사회, 특히 성과주의적 삶의 태도가 반복되어 왔던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현실일 존재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껏 남들보다 좀 더 잘하기 위해서, 더 좋은 결과물을 위해서 달려왔다. 아침에도 달리고, 점심에도 달리고, 저녁에도 달리고, 그 다음날 새벽부터 달리고. 이런 무한경쟁의 사회를 가리켜서 독일에서는 ‘팔꿈치사회(Ellenbogengesellschaft)란 말을 한다고 한다. 즉, 옆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앞만 보고 달려야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라는 말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잘 만든 용어이다. 끝없는 마라톤 경주에서 모두가 앞만 보고 달리는데, 자기 옆에 다른 사람이 따라붙으려고 하면 팔꿈치를 옆으로 휘두르면서 남의 옆구리를 찌르는. 누가 보아도 반칙일 수 있지만 포커페이스를 하면서 달리기 모션을 크게 하는 양, 절묘하고 속이면서 옆사람을 밀쳐내고서 1등을 한다면 그 1등에게 박수를 보내는. 사회를 가리켜서하는 말이다. 잠시 일을 접고 팔꿈치를 잠시 훑어볼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이 쳐서 굳은살이 박히지는 않았는지, 혹은 깊은 상처로 곪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그런데도 또 신기한 사실은 왜 그렇게 뛰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통계자료나 객관적 지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미니홈피같은 SNS에서 던지는 말들도 신뢰도가 있는 자료라면 근거라고 자신있게 내밀 수 있다. 집은 안식처가 아니라 잠시 들리는 버스 정류장과 같은 곳이 돼버렸다. 모두들 피곤해하고 바퀴는 돌아가고 버스는 토해내고 손가락은 무언가를 치고 있고 술이 들어가고 눈이 떠지고 바퀴가 돌아가고. 여기서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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