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ulo Freire 『페다고지』를 읽고-
Ⅰ. 서론
보통의 대학을 다니는 나이인 20대가 아닌 그 2배수의 나이에 뒤늦게 교사가 되기로 하고 올해 입학했다. 입학 전에 교사가 뭐 길래 왜 구지 힘들게 기존의 하던 일도 있는데 편안한 삶을 두고 그렇게 힘들게 다시 공부하러 가냐고 주변에서 많이 말렸다. 석사 과정이 처음도 아니니 이해가 될만도 한 말이다. 한때 어릴 때 꿈이 교사이긴 했으나, 중학교 선생님들이 수업에 들어와서 토로하시는 말씀을 듣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교사의 꿈을 접었다. 그 말은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1반부터 7반까지의 아이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똑같은 말을 하고 사는 것도 참 힘든 일이다. 니들이 좋아서 시작한 것인데 지금은 밥벌어 먹기 위해서 테이프처럼 말하고 사는 것 같다”라는 선생님의 양심발언이였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내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 듣는 말인데...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 였다. 매일 똑같은 말을 반마다 돌아가시면서 그것도 10년이상을 하고 계셨으니, 힘들만도 하신 일이다. 평상시 존경하던 선생님 한 마디 푸념이였지만, 나에게는 선생님의 입장과 교사라는 직업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15살 중학교 2학년 어느 날이였던 것 같다.
결국에는 짧게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석사과정을 밞고 미술치료사, 심리치료사로 일하던 중, 우연히 교수님의 권유로 학교폭력 예방사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최전방에서 아이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막상 공부는 시작했지만 아동청소년 심리치료만 해오던 내가 교육의 현장에 가려다 보니 ‘교육’이란 정의조차 서지 않았다는 나를 발견하고 무지를 탈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교직수업을 열심히 듣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교육에 관련된 필수서적들을 읽고 싶었다. 그 책들 중 한 권이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였다. 첫 느낌은 루소의 『에밀』과 비슷한 느낌으로 첫 장을 넘기기 힘든 책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교육학의 유치원생이라고 생각하고 프레이리가 말하는 개념부터 차근히 따라가 보기로 했다. 교육학에 고수이신 교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 기본적인 개념이시겠지만, 교육학에 처음으로 입문하는 저에게는 너무 생소한 단어라 개념정리와 한 줄한 줄 제대로 소화하려는 열정을 높게 사주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Ⅱ. 본론
1. 프레이리의 생애
민중교육자이고, 교육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인 그는 1921년 브라질에서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브라질 북동부의 항구도시인 레시피는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가 공동운명을 겪고 있는 가난과 문맹과 정치적 억눌림의 현실을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여파는 브라질까지 밀어닥쳐 그의 중산층가정에도 심각한 향을 미쳤다. 그는 배를 쥐어짜는 굶주림의 고통을 체험하고 학교공부에 무관심해져 성적이 뒤떨어졌다. 열한 살이라는 나이에 일생을 굶주림에 대항하여 투쟁하는데 바치기로 맹세한 것도 바로 그 때였다. 이 배고픔과 가난으로 그는 학업성적이 나빠 2년을 낙제하게 되었는데 교사들은 이를 모르고 그를 지진아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집안사정이 다소 향상되었을 때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프레이리는 가정의 현실적 요구로 법과 철학을 동시에 공부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에게 법률학 공부는 커다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시 대학에서는 주로 프랑스 학자들의 급진적 서적이 많이 나돌아 프레이리를 자극했다. 그는 특히 알튀세, 푸코, 프롬, 레비스트로스, 마리탱, 무니어, 샤르트르 등의 책을 두루 섭렵했다. 이때 시간제로 중등학교의 포르투갈어 교사로 있으면서 노동자, 빈민출신의 학습자 부모들과 면담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그들이 자신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 대학에서 배운 이론으로 대화하려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1944년에 프레이리는 초등학교 교사인 엘자와 결혼했다. 대학졸업 후 프레이리는 대학 때부터 언어학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결과 포르투갈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면서 교직에 첫 발을 들여 놓는다. 그는 변호사 자격도 갖고 있었으나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교육자의 삶에 더 애착을 보였다. 이후 박사학위논문이 통과될 때까지 부부의 가정생활은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1959년까지 문맹퇴치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후 그는 문맹자를 교육 시키는 전통적 교육 방법에 회의를 느끼게 되어 새로운 방법론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는 그가 개발한 문맹퇴치운동과 각성 교육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1964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프레이리는 체포된 후 70일간 투옥되었으며 시민권을 박탈당한 후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 후 그는 칠레에서의 망명생활을 하면서 성인들을 위한 문해교육 활동은 중단하지 않고 계속한다. 그는 이때부터 남편으로서나 아빠로서의 모든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프레이리는 1969년에서 1970년까지 켐브리지와 매사츄세츠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의 객원교수를 하며 강의와 연구를 하게 되고 다소 생각의 여유가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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